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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오 메뎀 감독의 《루시아》는 지중해의 눈부신 백사장과 타오르는 태양을 배경으로,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감각적으로 허무는 에스파냐 시네마의 수작이라고 한다. 영화가 품고 있는 치명적인 관능과 눈이 시리도록 화사한 영상미는 시각적인 탐미주의의 극치를 보여주지만, 그 아름다운 미장센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인물들의 뒤틀린 관계와 음산한 비밀들이 기묘하게 얽혀 있다. 예술이라는 세련된 외피를 두르고 있으나 그 본질은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욕망과 파격을 다룬 잔혹한 연대기다.

줄거리: 연인의 실종,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된 섬으로의 도피

마드리드의 한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루시아(에스파냐 안야)는 오랜 연인이자 소설가인 로렌소(트리스탄 울로아)가 자살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진다. 그녀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로렌소가 평소 소설의 영감을 얻기 위해 자주 언급했던 외딴 지중해의 섬으로 무작정 도피성 여행을 떠난다. 눈부신 태양과 하얀 모래사장, 그리고 끝없는 바다가 펼쳐진 그곳에서 루시아는 기묘한 매력을 지닌 섬 주민들과 조우하며 과거 로렌소와 함께했던 뜨겁고 위태로웠던 기억들을 하나씩 반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사이, 섬의 고요한 공기 속에는 로렌소의 과거와 얽힌 치명적인 비밀의 불씨가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결말: 소설과 현실이 뒤엉킨 섬, 기상천외한 조우의 파국 (※ 스포일러 주의)

사실 로렌소는 죽지 않았으며, 그가 쓰던 소설 속 이야기는 현실의 인물들과 기괴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과거 로렌소는 하룻밤 수영장에서 만난 여인 엘레나(나와 님리)와의 사이에서 딸 '루나'를 낳았으나 그 사실을 모른 채 살아왔고, 이후 루나의 베이비시터인 벨렌(엘레나 아나야)과도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었다. 맹견에게 딸을 잃은 엘레나의 슬픔과 소설의 서사가 폭주하는 가운데, 소설의 결말을 바꾸기 위해 섬으로 찾아온 로렌소와 엘레나, 그리고 벨렌과 루시아가 결국 이 좁은 지중해 섬 한복판에서 기어코 마주치게 된다. 소설과 현실, 우연과 운명이 기상천외하게 뒤엉킨 아수라장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의 비밀을 대면하고, 뒤틀린 관계의 실타래를 완전히 매듭짓지 못한 채 묘한 해방감과 씁쓸함이 공존하는 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운명과 우연으로 포장된, 상상 초월의 스페인산 막장 텍스트가 주는 배반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각적 미장센과 지중해의 맑고 투명한 영상미는 그야말로 탐미주의의 정점이라 부를 만하다. 그러나 매혹적인 화면에 취해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머릿속을 강렬하게 스치는 냉소적인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인물들이 관계를 맺고 갈등을 유발하는 구조는 흡사 지구의 전체 인구가 딱 100명 정도밖에 남지 않은 고립된 세상에서나 발생할 법한 기상천외한 우연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연출을 맡은 훌리오 메뎀 감독이 아무리 인간의 운명과 영혼의 이끌림, 우연의 미학에 정신이 나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사를 이끄는 이 지독한 우연의 남발은 이성적인 관람의 궤도를 심각하게 이탈한다.

 

아무리 문학적인 소설 구조와 에로틱한 예술 시네마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보기 좋게 포장하려 애써도,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고 마주한 텍스트의 실체는 스페인산 원조 막장 드라마의 전형 그 자체에 가깝다. 전 여친과 현 여친, 숨겨진 딸과 그 딸의 보모, 그리고 하룻밤의 정사가 온 통로를 거쳐 결국 좁디좁은 외딴섬 하나로 수렴되는 이 해괴망측한 역학 구조는 실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상업적 클리셰보다 더 지독하게 꼬여버린 인물들의 치정극은 시각적 아름다움과 정서적 불쾌감이라는 극단적인 배반감을 선사한다. 감각적인 미장센의 성취만큼이나, 서사적 개연성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연출의 과욕이 대단히 황당하면서도 묘한 뒤끝을 남기는 파격적인 타이틀이다.


"지구의 인구가 딱 100명 있을 때 발생할 내용이다. 감독이 아무리 운명과 우연에 정신 냐간 사람이더라도 이건 너무 심한거 아닌가 싶다. 소설과 예쑬로 포장한 스페인산 원조 막장 드라마가 아닐까"

 

지중해의 눈이 시리도록 하얗고 매혹적인 스크린 뒤에 숨겨진, 인구 100명짜리 세상의 기괴한 우연 연대기. 예술과 관능이라는 미명하에 온갖 치정과 비밀의 파편을 한데 모아 폭발시키는 스페인 거장의 탐미주의적 막장 시네마.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하얗게 바랜 섬의 백사장 위로 인물들의 엇갈린 실루엣이 교차하고,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게 허물어지는 마지막 프레임을 끝으로 영사를 마감했다. 스페인 영화 특유의 과감한 노출과 지중해의 눈부신 태양이 자아내는 비주얼 테크닉은 비주얼 아카이브로서 확실히 눈길을 사로잡는 탐미적 아우라를 보장한다. 그러나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무차별적으로 들이미는 우연의 일치와 뒤틀린 관계망은, 러닝타임이 끝난 뒤 세련된 예술적 여운을 남기기보다 원조 막장극을 목도한 듯한 허탈한 실소를 먼저 세우고 만다.

 

스토리는 음산하고 뒤틀려 있어 기분이 묘하게 나쁜데 미장센만큼은 눈이 시리도록 경이로운 작품의 경계를 인정하여, 이 타이틀은 [기분나쁘게 아름다운 것들] 카테고리에 명확히 입주시킨다. 영상미가 자아내는 탐미주의적 성취는 훌륭하나, 운명론에 심취한 감독의 과욕이 빚어낸 텍스트의 황당함과 서사적 조잡함 역시 가감 없이 공존하는 작품이다. 비주얼의 매혹과 서사의 불쾌함이 기묘하게 저글링하는 이 독특한 스페인산 파편을 아카이브 랙 한구석에 씁쓸한 만족감과 함께 안착시키며 오늘 밤의 기록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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