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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방벽

본 리뷰는 <로스트> 시즌 4, 6화(The Other Woman)까지의 내용만을 철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후 전개에 대한 어떠한 단서나 스포일러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현재 진행형' 리뷰이니 안심하고 감상해 주세요!

 

이번 6화 '또 다른 여인(The Other Woman)'은 아더스의 텐션 넘치는 삼각관계(?)를 빙자한 벤의 기괴한 소유욕을 조명하며, 섬 전체를 집어삼키려 했던 가스 실과 화물선 배후의 정체가 폭로되는 매우 중요한 회차입니다.

로스트 시즌 4 6화. 섬의 모든 생명체를 몰살시킬 수 있는 템페스트 스테이션의 독가스를 무력화하려는 화물선 요원들.
템페스트 스테이션 내부에서 방호복을 입고 독가스 밸브를 잠그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린 다니엘 패러데이와 샬럿의 씬

 

이번 화의 핵심 장면 (디테일과 연출) 이번 화의 플래시백은 섬 내부(과거)에서 진행됩니다. 줄리엣과 굿윈의 내연 관계, 그리고 이를 눈치챈 벤의 광기 어린 질투가 에피소드 전체를 지배합니다.

 

가장 압도적인 명장면은 굿윈이 꼬리 칸 생존자들(아나 루시아 일행)에게 정체를 들켜 처참하게 살해당한 뒤, 벤이 줄리엣을 그 시체 앞으로 데려가는 씬입니다. 오열하며 "왜 그를 사지로 보냈냐"고 원망하는 줄리엣을 향해 벤이 차가운 얼굴로 뱉는 한마디, "너는 내 것이니까(Because you're mine)." 이 대사는 벤자민 라이너스라는 인물이 가진 통제욕과 집착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지를 뼛속까지 각인시키는 소름 돋는 연출이었습니다.

마침내 밝혀진 화물선의 진짜 배후. 찰스 위드모어의 서류를 로크에게 넘기는 벤자민 라이너스.
감금된 방 안에서 존 로크에게 찰스 위드모어의 비디오테이프와 문서를 건네며 거래를 제안하는 벤의 모습

 

[심리 프로파일링] 줄리엣의 트라우마와 해방

  • [심리 프로파일링] 줄리엣의 트라우마와 해방: 줄리엣은 섬에 온 이후 벤의 교묘한 심리 통제 아래서 철저히 소유물로 취급받았습니다. 현재 시점에서 잭을 향한 그녀의 흔들리는 눈빛과, "그(벤)가 당신(잭)이 날 좋아하는 걸 알면 죽일 거다"라는 고백에는 오랜 가스라이팅이 남긴 깊은 공포가 서려 있습니다. 잭이 그녀에게 키스하며 벤의 위협을 정면으로 부정할 때, 줄리엣은 비로소 벤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심리적 동력을 얻게 됩니다.
  • [이스터에그] 템페스트 스테이션과 '퍼지(The Purge)': 극 중 등장하는 템페스트(Tempest) 발전소는 단순한 화학 기지가 아닙니다. 시즌 3 플래시백에서 벤과 아더스가 다르마 이니셔티브 사람들을 독가스로 몰살시켰던 '퍼지' 사건 당시, 그 어마어마한 양의 독가스를 방출했던 진원지가 바로 이곳이었음이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연결됩니다.

미스터리 추적 일지 (현재 시점)

  • [핵심 떡밥 회수] 찰스 위드모어의 등장: 지난 4화에서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던 화물선의 진짜 주인이 드디어 벤의 입을 통해 선언됩니다. 로크를 회유하기 위해 벤이 꺼내든 파일의 주인공은 바로 찰스 위드모어(데스몬드의 연인 페니의 아버지)였습니다. 화물선 사람들은 구조대가 아니라 위드모어의 명령을 받고 벤을 생포(혹은 섬을 장악)하러 온 용병들이었음이 공식적으로 밝혀지며, 극의 판도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 [신규 미스터리] 정글의 나타난 하퍼: 굿윈의 아내이자 줄리엣의 상담사였던 하퍼가 정글 한가운데 뜬금없이 나타나 벤의 명령(패러데이와 샬럿을 죽여라)을 전하고 사라집니다. 특유의 '속삭임(Whispers)'과 함께 환상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그녀는 진짜 인간일까요, 아니면 검은 연기가 만들어낸 섬의 환영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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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줍잖게 진지한 척 무게를 잡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무너지는 블록버스터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하지만 자신이 태생부터 어떤 영화인지 정확히 알고, 작정하고 화끈하게 망가지는 법을 아는 액션 영화는 언제 봐도 관객의 가슴을 뻥 뚫어준다. 80년대 전설적인 TV 시리즈를 스크린으로 완벽히 부활시킨 조 카나한 감독의 2010년작 《A-특공대》를 쿠팡플레이를 통해 감상했다.

줄거리: 누명을 쓴 최정예 특수부대, 탈옥과 반격의 서막

이라크 전쟁에서 수많은 불가능한 작전을 완수해 낸 미 육군 레인저 최정예 팀 'A-특공대'. 천재적인 지략가 한니발(리암 니슨) 대령을 필두로, 작업과 사기의 달인 멋쟁이(브래들리 쿠퍼), 무시무시한 파워를 자랑하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는 B.A.(퀸튼 잭슨), 그리고 조종 실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적인 미치광이 머독(샬토 코플리)까지.

 

팀은 바그다드에서 10억 달러 상당의 미화 위조지폐 동판과 현금을 회수하라는 CIA 요원 린치(패트릭 윌슨)의 극비 비공식 작전을 완벽하게 성공시킨다. 그러나 귀환 직후 지휘관인 모리슨 장군이 타고 있던 험비가 폭파당하며 동판을 강탈당하고, 지휘관을 살해하고 국고를 빼돌렸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4인방은 군사재판을 거쳐 각기 다른 최고 보안 등급 교도소로 뿔뿔이 흩어져 수감된다.

 

6개월 후, 한니발을 찾아온 CIA 린치는 배신자인 파이크(브라이언 블룸)가 동판을 사적으로 처분하려 한다며 동판 회수를 조건으로 탈옥을 돕겠다고 제안한다. 한니발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가사 상태에 빠져 영안실을 통해 탈출한 뒤, 멋쟁이, B.A., 그리고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던 머독까지 차례로 탈옥시키는 데 성공한다.

결말: 공중 탱크 활공과 부두 하역장의 대역전극 (※ 스포일러 주의)

동판을 되찾기 위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날아간 A-특공대는 C-130 수송기를 탈취해 공중으로 도주한다. 그러나 탈옥범들을 체포하고 격추하기 위해 출격한 독일 주둔 미군 기지의 무인 공격기(MQ-9 리퍼 드론) 편대로부터 맹렬한 미사일 공격을 받아 수송기가 공중 분해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다. 이 순간, 그들은 수송기 화물칸에 실려 있던 주력 전차(탱크)에 탑승해 낙하산을 펼친 채 허공으로 다이빙한다. 떨어지는 탱크 안에서 주포를 쏴 추진력을 얻고 반동으로 방향을 틀어가며 호수 한가운데로 기적처럼 비상 착륙하는 기상천외한 명장면을 완성한다.

 

마침내 배신자 파이크와 흑막을 추적한 팀은 죽은 줄 알았던 모리슨 장군이 살아있으며, CIA 린치가 동판을 독차지하기 위해 파이크와 짜고 꾸민 거대한 음모였음을 밝혀낸다. 그러나 린치는 증거 인멸을 위해 모리슨 장군을 공습으로 폭살시키고, A-특공대를 다시 제거하려 든다.

 

로스앤젤레스 항구의 거대한 컨테이너 하역장. 멋쟁이가 설계한 '3차원 마술 트릭' 작전 아래, 수십 개의 컨테이너가 도미노처럼 붕괴하고 거대한 화물선이 폭파되는 아수라장이 펼쳐진다. 파이크는 격투 끝에 B.A.에게 처단당하고, 흑막 린치는 머독의 방탄 헬멧 트릭에 속아 국방범죄수사국(DCIS) 소사 대위(제시카 비엘)와 요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범죄를 자백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비록 공식 절차상 탈옥 혐의로 인해 다시 호송차에 수감되는 신세가 되지만, 소사 대위는 멋쟁이에게 작별 키스를 건네며 수갑 열쇠를 입으로 전해준다. 호송차 안에서 한니발의 트레이드마크인 "작전이 계획대로 들어맞을 때의 쾌감(I love it when a plan comes together)"이라는 대사와 함께, 언제든 다시 탈출할 준비를 마친 4인방의 유쾌한 미소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어설픈 A급 척하지 않고, 제대로 망가져 도달한 B급의 진정성

영화를 보는 내내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는다. 일단 망가지려면 제대로 망가져야 작품이 된다는 걸 명확히 증명하는 영화다.

 

만약 어설프게 진지한 척 폼을 잡거나 '품격 있는 A급 첩보물'인 척 무게를 잡는 영화였다면, 공중에서 낙하하는 탱크가 대포를 쏴서 궤도를 꺾고 착륙하거나 정신병원 환자들과 3D 안경을 쓰고 입체 영화를 보며 탈옥하는 설정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옥의 티'이자 조롱거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A-특공대》의 위대함은 바로 "난 원래 이런 영화야!"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뻔뻔함과 순수한 B급 정서에 있다.

 

자신들의 정체성이 논리적인 현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화적 상상력과 아드레날린 터지는 쾌감에 있음을 정확하게 인정하고 들어간다. 그렇기에 그 황당무계하고 비현실적인 액션들조차 관객을 기만하는 억지가 아니라, 장르를 향한 유쾌한 진정성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뻔뻔한 진정성 위로 빵빵 터지는 캐릭터들의 티키타카와 박진감 넘치는 폭발이 더해지니, 극강의 오락 영화로서 재미는 덤으로 완벽하게 챙겨간다.

비행기 대신 탱크를 날려버리는 당당한 뻔뻔함.
폼 잡지 않고 제대로 망가져 완성한 21세기 최고의 팝콘 액션 활극.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쿠팡플레이 스트리밍으로 감상했다. 리암 니슨의 중후한 리더십과 브래들리 쿠퍼의 능청스러운 멋쟁이 연기, 샬토 코플리의 미친 존재감이 만들어낸 시너지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여전히 시원시원하다. 머리 비우고 온전히 도파민을 충전했던 시간을 기억하며, 수장고의 [멀티플렉스의 유령들] 룸에 유쾌하게 수납한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이전 감상문 보기: [이걸 왜 봐요? (근데 난 봄) #21] 파격과 불친절 사이, 왜 사람들은 세이준 미학에 열광하는가: 《살인의 낙인 (Branded to Kill, 1967)》 No. 294 :: 4K 개봉기 아카이브

 

[이걸 왜 봐요? (근데 난 봄) #21] 파격과 불친절 사이, 왜 사람들은 세이준 미학에 열광하는가: 《

영화사 사장이 "이해할 수 없는 쓰레기"라며 감독을 해고해 버린 전설적인 일화의 주인공, 스즈키 세이준의 1967년작 《살인의 낙인》. 파격적인 시각적 전위와 B급 누아르의 광기가 뒤엉킨 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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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사장이 "이해할 수 없는 쓰레기"라며 감독을 해고해 버린 전설적인 일화의 주인공, 스즈키 세이준의 1967년작 《살인의 낙인》. 파격적인 시각적 전위와 B급 누아르의 광기가 뒤엉킨 이 기묘한 필름 앞에서, 과연 수많은 영화광들이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는 독창적 에너지는 어디에 닿아 있는지 질문을 던지며 화면을 열었다.

밥 짓는 냄새에 흥분하는 킬러와 조준경 위의 나비

일본 암살자 조직에서 실력 서열 3위로 인정받는 킬러 하나다 고로(시시도 조). 그는 갓 지은 밥 냄새를 맡아야만 극도의 쾌감과 성적 흥분을 느끼는 기괴한 강박증을 앓고 있다. 호송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비 내리는 도로변에서 차가 고장 나 멈춰 선 의문의 여인 미사코를 도와준 하나다는, 이후 집으로 찾아온 그녀로부터 거부할 수 없는 위험한 암살 의뢰를 수락한다.

 

삼엄한 경비 속에서 타깃인 외국인을 향해 저격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조준경 렌즈 위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사뿐히 내려앉는다. 시야가 가려지며 빗나간 총탄은 타깃 대신 뒤편에 서 있던 의뢰인 미사코의 이마를 관통하고, 암살은 처참한 실패로 끝난다. 조직의 철칙을 어긴 대가로 하나다는 하루아침에 제거 대상이 되고, 아내에게마저 배신당해 총격을 맞으며 쫓기는 신세로 전락한다.

보이지 않는 1위 '팬텀'과의 기괴한 동거, 링 위의 허무 (※ 스포일러 주의)

생사의 갈림길에 선 하나다의 목을 조여오는 존재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지하세계 서열 1위의 전설적인 암살자 '넘버 원(팬텀)'. 그는 하나다를 단숨에 쏘아 죽이는 대신, 그의 아파트로 불쑥 찾아와 한 방에서 먹고 자고 소변을 보며 주인공의 신경증과 공포를 한계치까지 쥐어짠다.

 

극심한 수면 부족과 망상 속에서 서서히 미쳐가던 하나다는 마침내 텅 빈 복싱 체육관에서 팬텀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링 안에서 극도의 피로와 신경증으로 허덕이는 하나다를 향해 어둠 속 높은 조명대 위에서 저격을 가하던 팬텀. 하지만 찰나의 순간 하나다가 날린 총탄에 맞은 팬텀이 링 바닥으로 추락해 숨을 거둔다. 자신이 이제 전설적인 '넘버 원'이 되었다며 허공을 향해 피투성이 주먹을 치켜들고 홀로 환호성을 지르지만, 링 위에는 그를 지켜보는 관중도, 그 어떤 보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텅 빈 사각의 링 안에서 홀로 비틀거리는 킬러의 공허한 독백과 함께 영화는 당혹스러운 파열음을 내며 끝을 맺는다.

파격적이고 감각적이지만, 나와는 도무지 맞지 않는 스즈키 세이준의 세계

지난번 보았던 그의 대표작 《동경 방랑자(1966)》에 이어 두 번째로 접하는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다. 솔직히 감상 전에는 꽤 기대를 걸었던 작품이었으나, 이번에도 다시 한번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는 나와는 결코 맞지 않는 스타일이라는 점을.

 

물론 그에게 열광하는 수많은 시네필과 평단이 느끼는 흥분을 내가 온전히 캐치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동경 방랑자》에서도 강하게 느꼈듯, 그의 영화가 상당히 스타일리시하고 독특하며 파격적인 면모가 대단히 강한 작품이라는 점은 보장한다. 이번 《살인의 낙인》 역시 죽은 나비로 도배된 벽, 파편화된 몽타주, 흑백의 극단적인 명암 대비 등 도드라지게 눈에 띌 정도로 시각적인 인상이 깊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은 지극히 낯설고 투박하다.

 

사건과 사건 사이를 잇는 부드러움이나 물 흐르듯 이어지는 서사의 자연스러움을 눈을 씻고 찾아봐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인물의 감정선은 맥락 없이 튀고 장면은 뚝뚝 끊기다 보니, 91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지켜보기가 상당히 버겁고 힘들었다.

 

영화사 사장이 홧김에 감독을 해고해 버린 일화가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실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대체 전 세계의 영화광들이 그토록 입을 모아 찬양하는 이 '세이준 미학'의 실체가 무엇인지 나 역시 제대로 한 번 이해해 보고 싶다는 오기 어린 갈증이 든다. 1960년대의 거친 흑백 B급 필름이 아니라, 그가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연출한 비교적 최근(후기)의 작품들은 또 어떤 결을 지니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조준경 위의 나비와 밥 짓는 냄새.
스타일의 현란함 뒤에 남겨진 불친절한 이야기의 벽.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이전에 블로그를 통해 실물 패키지와 북클릿 구성을 자세히 다루었던 크라이테리온(The Criterion Collection) 블루레이(1-Disc BD-50)로 본편을 정주행했다. 흑백과 핫핑크의 강렬한 팝아트 감성을 뽐내던 패키지 디자인 못지않게, 1080p 해상도와 2.35:1 와이드 화면비로 복원된 흑백의 영상미는 시각적으로 분명 황홀한 구석이 있었다.

 

다만 토니 레인즈의 에세이에서 찬사를 보낸 아방가르드 연출과는 별개로, 뚝뚝 끊기는 서사의 불연속성이 안겨주는 피로감은 쉽게 극복하기 어려웠다. 60년대 누아르의 문법을 박살 낸 세이준 특유의 기괴한 아우라와 파격을 확인한 셈 치며, 수장고의 [이걸 왜 봐요? (근데 난 봄)] 랙에 수납한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 관련 포스팅 링크:

👉 [Unboxing] 살인의 낙인 (Branded to Kill, 1967) -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블루레이 개봉기 :: 4K 개봉기 아카이브

 

[Unboxing] 살인의 낙인 (Branded to Kill, 1967) -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블루레이 개봉기

Overview: 스즈키 세이준의 한계 없는 아방가르드 누아르일본 B급 영화의 거장 스즈키 세이준(Seijun Suzuki) 감독이 남긴 가장 파격적이고 초현실적인 야쿠자 누아르 걸작, 크라이테리언 컬렉션(Crit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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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감상문 보기: [산업 폐기물 처리장 (내 아까운 2시간 물어내) #15] 이유도 안 알려주는 겉멋과 망조 든 결말의 환장 파티: 《종말의 끝 (How It Ends, 2018)》 No. 292 :: 4K 개봉기 아카이브

 

[산업 폐기물 처리장 (내 아까운 2시간 물어내) #15] 이유도 안 알려주는 겉멋과 망조 든 결말의 환

넷플릭스 썸네일에 포레스트 휘태커와 테오 제임스의 얼굴이 떡하니 박혀 있고, '미 대륙을 덮친 원인 불명의 재앙'이라는 문구가 보이면 누구라도 한 번쯤 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2시간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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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감상문 보기: [멀티플렉스의 유령들 #75] 어설픈 폼 잡기 대신 화끈하게 망가진 B급의 미학, 통쾌함과 재미의 정점: 《A-특공대 (The A-Team, 2010)》 No. 295 :: 4K 개봉기 아카이브

 

[멀티플렉스의 유령들 #75] 어설픈 폼 잡기 대신 화끈하게 망가진 B급의 미학, 통쾌함과 재미의 정

어줍잖게 진지한 척 무게를 잡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무너지는 블록버스터들이 넘쳐나는 시대다. 하지만 자신이 태생부터 어떤 영화인지 정확히 알고, 작정하고 화끈하게 망가지는 법을 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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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방벽

본 리뷰는 <로스트> 시즌 4, 5화(The Constant)까지의 내용만을 철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후 전개에 대한 어떠한 단서나 스포일러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현재 진행형' 리뷰이니 안심하고 감상해 주세요!

 

전 세계 수많은 미드 팬들과 평론가들이 <로스트> 전체 시즌을 통틀어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바로 그 에피소드입니다! 이번 5화 '상수(The Constant)'는 복잡한 SF적 타임 리프 설정과 가슴을 울리는 절절한 로맨스를 완벽한 비율로 직조해 낸, 텔레비전 역사상 가장 위대한 45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스트 시즌 4 5화. 1996년과 2004년을 넘나드는 의식의 시간 여행 끝에 마침내 페니와 연락이 닿은 데스몬드 흄.
화물선의 통신실에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붙잡고 페니와 통화하며 오열하는 데스몬드의 씬

 

이번 화의 핵심 장면 (디테일과 연출) 어떤 수식어가 필요할까요. 이번 에피소드의 하이라이트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극 후반부 데스몬드와 페니의 크리스마스이브 전화 통화 씬입니다.

 

헬기를 타고 화물선으로 향하던 중 뇌에 이상이 생겨 1996년과 2004년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죽어가는 데스몬드. 그가 살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에 모두 존재하는 단 하나의 강력한 닻, 즉 '상수(Constant)'가 필요했습니다. 1996년의 데스몬드가 페니를 찾아가 "8년 뒤 크리스마스이브에 전화를 걸 테니 제발 번호를 바꾸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마침내 2004년 현재 화물선에서 다이얼을 돌렸을 때 페니가 전화를 받는 교차 편집은 시청자의 눈물샘을 완벽하게 무장해제 시킵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다급하게 반복하며 전화가 끊기는 순간의 여운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데스몬드의 타임 리프를 해결하기 위한 다니엘 패러데이의 공식 수첩과 &amp;#39;상수(Constant)&amp;#39;의 개념.데스몬드의 타임 리프를 해결하기 위한 다니엘 패러데이의 공식 수첩과 &amp;#39;상수(Constant)&amp;#39;의 개념.
1996년 옥스퍼드 대학 연구실에서 방사선 실험을 하고 있는 젊은 다니엘 패러데이와 그의 수첩 씬

 

캐릭터 심리 프로파일링 & 숨은 이스터에그

  • [심리 프로파일링] 데스몬드의 운명적 사랑: 데스몬드 흄이라는 캐릭터가 왜 <로스트>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인지 이번 화에서 확실히 증명됩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끔찍한 상황 속에서도, 8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직 한 여자, 페니만을 바라봅니다. 그에게 페니는 단순한 연인을 넘어, 혼돈과도 같은 섬과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유지하게 해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었습니다.
  • [이스터에그] 찰스 위드모어 경매장의 '블랙 락(Black Rock)': 1996년 데스몬드가 찰스 위드모어를 찾아갔을 때, 위드모어는 경매에서 한 항해일지를 낙찰받고 있었습니다. 그 배의 이름이 바로 시즌 1 정글 한가운데서 발견되었던 노예선 '블랙 락 호'입니다. 위드모어와 섬의 연결고리가 결코 우연이 아니며, 아주 오래전부터 섬의 미스터리를 추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소름 돋는 떡밥입니다.

미스터리 추적 일지 (현재 시점)

  • [규칙의 발견] 섬과 화물선의 기묘한 시간차: 헬기에 동승했던 사이드와 섬에 남은 패러데이의 무전 실험을 통해 엄청난 사실이 밝혀집니다. 헬기에서 화물선을 향해 로켓(페이로드)을 발사한 시간과 섬에 그 로켓이 도착한 시간 사이에 명백한 '시간의 지연'이 발생한 것이죠. 섬과 바깥세상(화물선)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 [경고 기제] 민코프스키의 비극적인 죽음: 화물선의 통신 장교 민코프스키 역시 데스몬드와 똑같은 증상(의식의 시간 여행)을 겪고 있었습니다. 상수를 찾지 못한 그의 뇌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출혈과 함께 사망하는 장면은, 데스몬드가 제한 시간 내에 페니와 통화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시한폭탄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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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제5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 8개 부문을 휩쓴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의 <간디(Gandhi)>. 벤 킹슬리의 압도적인 원맨쇼 뒤편에는, 1940~50년대 할리우드의 낡은 관습을 깨부수고 스크린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당대 최고 배우들의 숨 막히는 앙상블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시네필도, 작가주의 감독도 아니며 오직 배우를 사랑하는 연출자"라 칭한 리처드 아텐보로의 캐스팅 철학과 현장의 생생한 비하인드를 정리했습니다.

"배우의 최고를 끌어낸 연출자" — 명품 앙상블을 진두지휘한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


'블랙페이스'의 거부: 진짜 인도인을 찾아서

과거 서구 영화계에서는 인도인이나 유색인종 캐릭터를 백인 배우의 얼굴에 짙은 갈색 분칠(Brownface)을 덧칠해 연기시키는 관습이 흔했습니다. 하지만 아텐보로 감독은 기획 단계부터 이 구태의연한 관습을 결사반대했습니다.

"아프리카인은 아프리카 배우가, 인도인은 인도 배우가, 영국인은 영국 배우가 연기해야만 한다."

 

인도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 역으로 낙점된 로샨 세스(Roshan Seth)는 대중에게 친숙한 네루의 온화한 기품과 사소한 제스처까지 완벽히 체화하며 스크린을 장악했습니다.

 

인도 국민의회의 거두 사르다르 파텔 역의 사이드 재프리(Saeed Jaffrey), 그리고 간디의 곁을 지키다 옥중에서 숨을 거둔 성모 같은 아내 카스투르바 역의 로히니 하탕가디(Rohini Hattangady)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로히니는 숭고하고 절제된 열연으로 아시아계 배우 최초로 영국 아카데미(BAFTA) 여우조연상을 품에 안으며 전 세계 영화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분칠한 백인이 아닌 진짜 인도 배우들의 기품 — 로샨 세스

요절한 천재 이언 찰슨과 전설적인 '연극계의 기사단'

백인이면서도 간디의 비폭력 저항에 가장 먼저 공명해 헌신했던 영국인 성공회 사제 찰리 앤드루스 역은 당대 최고의 청년 명배우 이언 찰슨(Ian Charleson)이 맡았습니다.

 

<불의 전차(Chariots of Fire)>(1981)의 에릭 리델 역으로도 유명했던 그는 특유의 맑고 순수한 영혼의 연기를 유감없이 뽐냈습니다. 40세라는 너무나 이른 나이에 에이즈 합병증으로 요절했지만, 영국 연극계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이언 찰슨 상(Ian Charleson Award)'을 제정해 매년 가장 뛰어난 젊은 고전극 배우에게 수여하며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또한, 아텐보로 감독이 연출하는 모든 영화의 단골이자 페르소나였던 존 밀스 경(Sir John Mills)과, 대영제국 특유의 서늘한 귀족적 권위를 뿜어낸 존 길구드 경(Sir John Gielgud) 등 영국의 기사(Knight) 작위를 받은 전설들이 총독과 관료로 대거 포진하며 영화의 무게중심을 완벽하게 잡아주었습니다.

빈민의 참상을 보고 출연료 전액을 내놓은 마틴 쉰

<지옥의 묵시록>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마틴 쉰(Martin Sheen)은 극 중 간디의 투쟁을 서방 세계에 알리는 미국인 기자 빈스 워커 역으로 합류했습니다.

 

마틴 쉰은 촬영을 위해 방문한 인도 현지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빈민들과 특히 '하리잔(불가촉천민)'들이 처한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이 받기로 한 영화 출연료 전액을 캘커타의 극빈층 구호 기금으로 즉시 기부하며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그의 따뜻한 휴머니즘은 영화 속에서 간디와 나누는 교감 연기에도 고스란히 묻어났습니다.

캘커타 빈민을 위해 출연료 전액을 기부했던 마틴 쉰

"납작한 악당이 아니었다": 에드워드 폭스가 빚어낸 암릿차르의 광기

영화 속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처절한 시퀀스는 단연 1919년의 '암리차르 학살(잘리안왈라 바그 학살)'입니다. 무방비 상태로 평화 집회를 열던 남녀노소 군중을 벽으로 몰아넣고 10분간 무차별 난사를 명령해 대영제국의 몰락을 자초한 장본인, 레지널드 다이어 장군 역은 명배우 에드워드 폭스(Edward Fox)가 맡았습니다.

 

아텐보로 감독은 다이어 장군을 단순한 삼류 악당으로 얄팍하게 묘사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에드워드 폭스는 이 인물을 연기하며 섬뜩한 설득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다이어 본인의 뒤틀린 내면 속에서는 이 잔혹한 학살이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대영제국의 통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숭고한 의무'였다는 뒤틀린 신념을 차갑고 건조한 시선으로 그려낸 것입니다.

 

사후 청문회에서 "리엔필드 소총탄에 온몸이 찢긴 어린아이가 어떻게 걸어 나와 구호를 청하느냐"는 조사관의 서늘한 일갈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에드워드 폭스의 연기는 관객들에게 숨 막히는 서스펜스와 분노를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단순한 악당이 아니었다" — 뒤틀린 제국주의적 확신을 서늘하게 체화한 에드워드 폭스의 명연기

"배우의 최고를 끌어낸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다"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은 인터뷰 말미에 자신의 연출 인생을 관통하는 묵직한 소회를 남겼습니다.

"만약 훗날 누군가 나를 가치 있는 영화감독으로 기억해 준다면, 오직 이 한마디로 남고 싶습니다.

'그는 배역에 맞는 최적의 배우를 찾아낼 줄 알았고, 그 배우들이 평생 보여준 연기 중 가장 눈부신 명연기를 스크린에서 끄집어낼 줄 아는 연출자였다.'

사람들이 내 작품에 대해 그렇게 말해준다면, 감독으로서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명배우 출신이었기에 누구보다 배우의 숨소리와 호흡을 깊이 이해했던 거장. 리처드 아텐보로의 탁월한 안목과 배우들을 향한 헌신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간디>는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명품 앙상블의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해당 내용은 아래의 물리매체 부가영상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Unboxing] 간디 (Gandhi, 1982) - 스틸북 한정판 (4-Disc) 블루레이 개봉기 :: 4K 개봉기 아카이브

 

[Unboxing] 간디 (Gandhi, 1982) - 스틸북 한정판 (4-Disc) 블루레이 개봉기

Overview: 위대한 영혼의 여정을 담아낸 서사시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이 연출하고 벤 킹슬리가 주연을 맡은 불멸의 명작, 블루레이 개봉기입니다. 소니픽쳐스를 통해 정식 발매된 이 타이틀은 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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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화에 대한 감상문은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크레딧이 올라가도 #54] 비폭력의 정점과 분할의 심연: 〈간디〉가 목도한 해방의 역설과 식민의 유산 No. 250 :: 4K 개봉기 아카이브

 

[크레딧이 올라가도 #54] 비폭력의 정점과 분할의 심연: 〈간디〉가 목도한 해방의 역설과 식민의

영국 영화계의 거목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이 연출하고 벤 킹슬리가 영혼을 갈아 넣은 열연으로 마하트마 간디를 완벽하게 환생시킨 1982년작 전기 서사 대작 《간디(Gandhi)》. 제55회 아카데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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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썸네일에 포레스트 휘태커와 테오 제임스의 얼굴이 떡하니 박혀 있고, '미 대륙을 덮친 원인 불명의 재앙'이라는 문구가 보이면 누구라도 한 번쯤 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2시간 가까운 러닝타임이 끝났을 때 남는 것은 깊은 깨달음이나 서스펜스가 아니라, 내 피 같은 시간 113분을 허공에 날렸다는 극심한 분노뿐이다. 기획과 개연성이 장렬하게 폭망한 2018년작 넷플릭스 오리지널 중에 하나다.

줄거리: 시카고에서 시애틀까지, 2천 마일의 개고생 로드무비

변호사 윌(테오 제임스)은 임신한 약혼녀 사만다(캣 그래험)가 기다리는 시애틀을 잠시 떠나, 까다롭고 완고한 전직 군인 출신 장인어른 톰(포레스트 휘태커)을 만나 결혼 승낙을 구하기 위해 시카고로 날아간다. 불편한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날 아침, 공항으로 가려던 찰나 사만다와의 전화 통화 도중 의문의 굉음과 비명소리가 울리며 통신이 완전히 두절된다.

 

동시에 시카고를 비롯한 전역에 대규모 정전이 일어나고, 서부 해안가(시애틀 일대)에 지진인지 폭격인지 모를 초유의 대재앙이 발생했다는 흉흉한 소문만 나돈다. 비행기와 기차가 전면 마비되자, 사만다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톰과 윌은 톰의 튼튼한 4륜 구동 캐딜락을 타고 2,000마일이 넘는 대륙 서쪽 횡단길에 오른다.

 

치안이 붕괴되어 무법천지가 된 고속도로에서 기름을 노리는 약탈자들의 총격을 뚫고, 부패한 자경단과 추격전을 벌이며 나약했던 변호사 윌은 점차 살기 어린 총잡이로 변해간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드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 늑골 골절과 내출혈을 입은 장인 톰은 시애틀을 목전에 두고 차 안에서 숨을 거두고, 홀로 남겨진 윌은 장인을 묻어준 뒤 마침내 잿더미로 변해버린 시애틀에 도착한다.

결말: 제레마이어의 난입, 캠프파이어, 그리고 환장의 도주극 (※ 스포일러 주의)

사만다가 살던 폐허가 된 아파트에서 교외 숲속 별장으로 피신했다는 쪽지를 발견한 윌. 천신만고 끝에 별장에 도달해 살아있는 사만다와 눈물의 재회를 나눈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만다뿐만 아니라, 그녀를 지켜줬다는 이웃집 남자 제레마이어(마크 오브라이언)가 함께 머물고 있었다.

 

그날 밤, 사만다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구하려다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었다는 비보를 듣고도, 남친인 윌이 지쳐 잠든 틈을 타 제레마이어와 단둘이 오붓하게 캠프파이어를 피워놓고 술까지 홀짝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잠에서 깨어 캠프파이어 자리에 합류한 윌에게 제레마이어는 "이건 북한이나 중국의 EMP 공격일 수도 있고, 음모론이 어쩌구..." 하며 마치 지가 재앙의 전말을 다 안다는 듯 확신에 차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윌은 이에 정색하며 피곤한 언쟁을 벌인다.

 

다음 날 아침, 제레마이어가 윌의 차 주변을 수상하게 서성거리며 접근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한 윌. 무슨 짓을 하느냐고 따져 묻자 제레마이어는 "근처 애새끼들이 당신 차를 건드리고 있길래 확인하던 중이었다. 그놈들 어디 있는지 보여주겠다"며 윌을 깊은 숲속으로 유인한다.

 

숲 한가운데 이르자 제레마이어는 사만다를 향한 비뚤어진 집착을 드러내며 윌에게 권총을 겨눈다. 처절한 몸싸움 끝에 윌은 총을 빼앗아 제레마이어를 사살한다.

 

별장으로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거대한 지진과 함께 인근 화산이 폭발하며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화쇄류와 연기 폭풍이 몰려온다. 윌과 사만다는 차를 타고 지평선 너머로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아 도망치고, 쫓아오는 화산재 구름을 백미러로 비추며 영화는 "그래서 도대체 재앙의 원인이 뭔데?"라는 질문에 끝끝내 단 한마디의 해답도 내놓지 않은 채 어이없게 화면을 암전시켜 버린다.

끝까지 안 알려주는 겉멋과 망조 든 결말의 대환장 콜라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깊은 빡침과 함께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도대체 재앙의 이유가 뭔데?!"

 

이런 포스트 아포칼립스 아류작들의 모태가 된 명작 영화들은, 설령 재앙의 원인을 화면에 직접 보여주지 않더라도 라디오 뉴스나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최소한의 정황이나 언급은 해준다. 그런데 이 영화는 쓸데없이 겉멋만 잔뜩 들어서 "우리 영화는 끝까지 원인을 안 알려줄 거야. 그래야 있어 보이고 남들과 다르게 돋보이지!"라는 식의 얄팍한 심보로 러닝타임 내내 관객을 기만한다.

 

백번 양보해서 원인을 안 알려주는 불친절함까지는 장르적 뚝심이라 치고 눈감아줄 수 있다. 하지만 진짜 관객의 뒷목을 잡게 만드는 건 결말부에 뜬금없이 튀어나온 '제레마이어'라는 캐릭터와 그 이후의 환장할 전개다.

 

장인어른 목숨까지 바쳐가며 대륙을 횡단하는 개빡센 여정을 겪고 왔더니, 그 개고생의 마무리가 고작 '미친놈 만나서 여친 빼앗기기 직전의 치정 배틀'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다. 게다가 캠프파이어 자리에서 제레마이어라는 작자가 "이러이러한 외국의 공격 때문에 재앙이 터진 거 아니겠냐"라며 뇌피셜을 확신에 차서 늘어놓으면, 온갖 생고생 끝에 간신히 살아 돌아온 윌 입장에선 "아 눼눼, 그래요? 참 대단하시네요(XX 귀찮네)" 하고 대충 넘기면 될 일이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입에 거품을 물면서 "아니거든! 헛소리하지 마!"라며 쓸데없이 언쟁을 벌이는 꼴도 우습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는 건 여자친구 사만다의 태도다. 자기 아버지가 자기를 살리겠다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면서 남친을 보냈는데, 그 고생을 하고 온 남친이 곯아떨어져 자고 있는 틈을 고새를 못 참고 제레마이어랑 둘이서 캠프파이어를 켜놓고 히히덕거리며 술을 처먹고 있는 꼴을 보고 있으면 헛웃음마저 나온다. 결국 다음 날 숲으로 끌고 가 총질이나 해대는 미친놈한테서 여친을 지키는 꼴이라니.

 

도대체 시나리오를 어디까지 대충 쓰고 내던진 건지 알 수가 없다. 거창하게 벌려놓은 재난은 수습할 능력도 없어서 화산재 뒤로 도망치는 장면으로 퉁쳐버리고, 결말은 뜬금없는 삼각관계와 캠프파이어 술판으로 말아먹은, 그야말로 '망조가 제대로 든 산업 폐기물' 그 자체다.

2천 마일의 고생길 끝에 마주한 건 캠프파이어 술판과 숲속의 치정극.
겉멋에 취해 결말을 내던진 넷플릭스표 재앙.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넷플릭스 스트리밍으로 감상했다. 포레스트 휘태커의 묵직한 카리스마가 아까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떡밥 회수 실패, 개연성 증발, 발암 캐릭터의 환상적인 삼박자를 두루 갖춘 이 끔찍한 시간 낭비의 파편을 수장고의 [산업 폐기물 처리장 (내 아까운 2시간 물어내)] 깊숙한 곳에 영구 격리한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이전 감상문 보기: [멀티플렉스의 유령들 #74] 생각 없이 쉽게 따라가도 결코 유치하지 않은, 최동훈 장르 미학의 정점: 《도둑들 (The Thieves, 2012)》 No. 291 :: 4K 개봉기 아카이브

 

[멀티플렉스의 유령들 #74] 생각 없이 쉽게 따라가도 결코 유치하지 않은, 최동훈 장르 미학의 정

한국 상업 영화계에서 대중의 오락적 쾌감과 장르적 완성도를 동시에 쥐고 흔들 줄 아는 최동훈 감독의 2012년작 천만 케이퍼 무비 《도둑들》을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감상했다. 135분이라는 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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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감상문 보기: [이걸 왜 봐요? (근데 난 봄) #21] 파격과 불친절 사이, 왜 사람들은 세이준 미학에 열광하는가: 《살인의 낙인 (Branded to Kill, 1967)》 No. 294 :: 4K 개봉기 아카이브

 

[이걸 왜 봐요? (근데 난 봄) #21] 파격과 불친절 사이, 왜 사람들은 세이준 미학에 열광하는가: 《

영화사 사장이 "이해할 수 없는 쓰레기"라며 감독을 해고해 버린 전설적인 일화의 주인공, 스즈키 세이준의 1967년작 《살인의 낙인》. 파격적인 시각적 전위와 B급 누아르의 광기가 뒤엉킨 이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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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상업 영화계에서 대중의 오락적 쾌감과 장르적 완성도를 동시에 쥐고 흔들 줄 아는 최동훈 감독의 2012년작 천만 케이퍼 무비 《도둑들》을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 감상했다. 135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단 한순간도 지루할 틈 없이 관객을 끌고 가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장르적 세공술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카오의 다이아몬드에서 부산 아파트 총격전까지의 궤적

미술관 털이를 마친 뽀빠이(이정재), 예니콜(전지현), 씹던껌(김해숙), 잠파노(김수현)가 경찰을 피해 홍콩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옛 동료 마카오박(김윤석)이 제안한 거대한 판에 합류한다. 출소한 금고 털이 펩시(김혜수)와 중국 측 도둑들(임달화, 오달수 등)까지 뭉친 10인의 목표는 마카오 카지노에 숨겨진 희대의 다이아몬드 '태양의 눈물'. 하지만 마카오박과 뽀빠이, 펩시 사이에 얽힌 과거 배신의 앙금과 각자 보석을 독식하려는 속셈이 뒤엉키며 위태로운 잠입 작전이 시작된다.

 

작전 당일 금고는 열리지만 다이아몬드는 이미 마카오박이 빼돌린 뒤였고, 경찰의 급습으로 첸과 씹던껌이 목숨을 잃는 등 현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다이아몬드를 쥔 마카오박과 이를 쫓는 뽀빠이, 펩시, 예니콜, 그리고 장물아비 웨이홍 일당까지 모두 부산의 낡은 데파트 아파트로 집결한다. 외벽 와이어를 오르내리는 처절한 총격전 끝에 웨이홍은 사살되고 배신을 일삼던 뽀빠이는 비참하게 몰락한다. 혼란을 틈타 보석을 가로채 홍콩으로 튄 예니콜의 뒤를 마카오박이 다시 털어버리고, 과거의 오해를 푼 펩시에게 마카오박의 연락이 닿는 경쾌한 반전으로 이야기는 매듭지어진다.

생각 없이 쉽게 따라갈 수 있지만 결코 유치하지 않다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보았지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역시 생각 없이 쉽게 따라갈 수 있지만 유치하지 않은 영화를 만드는 데는 최동훈 감독이 대가다.

 

한국 상업 영화에서 수많은 캐릭터가 쏟아져 나오는 멀티캐스팅 무비는 자칫하면 인물들이 따로 놀며 산만해지거나, 관객을 억지로 웃기고 울리려는 신파와 억지 개그로 흘러 유치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최동훈 감독은 열 명이 넘는 주·조연 캐릭터 하나하나에 뚜렷한 욕망과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귀에 착착 감기는 맛깔스러운 대사와 리드미컬한 편집 덕분에 관객은 머리를 복잡하게 굴릴 필요 없이 그저 물 흐르듯 화면의 속도감에 몸을 맡기면 된다.

 

그러면서도 영화적 품격과 긴장감의 줄을 결코 팽팽하게 놓지 않는다. 마카오 카지노의 세련된 케이퍼 무비에서 출발해 후반부 부산 연산동 아파트 외벽의 투박하고 처절한 와이어 총격 액션으로 장르의 공기를 전환하는 뚝심은, 대중 오락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완성도를 보여준다.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도파민이자 웰메이드 오락의 정수다.

10인의 욕망을 꿰어낸 팽팽한 리듬.
쉬운 몰입 속에서도 끝내 유치해지지 않는 최동훈 표 케이퍼의 정석.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넷플릭스 스트리밍으로 감상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아도 대사의 차진 말맛과 캐릭터들의 티키타카, 그리고 후반부 부산 아파트 총격전의 서스펜스는 여전히 압도적인 흡인력을 자랑한다. 천만 관객의 선택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쾌작으로서, 수장고의 [멀티플렉스의 유령들] 룸에 기분 좋게 안착시킨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이전 감상문 보기: [크레딧이 올라가도 #63] 폐쇄된 '천사의 집'의 불길과 연쇄 살인, 억지스러운 각막 이식이 남긴 아쉬운 마침표: 《조용한 세상 (The World of Silence, 2006)》 No. 289 :: 4K 개봉기 아카이브

 

[크레딧이 올라가도 #63] 폐쇄된 '천사의 집'의 불길과 연쇄 살인, 억지스러운 각막 이식이 남긴

어두운 사회적 사각지대를 조명하는 스릴러 영화는 현실의 아픔을 파고들 때 비로소 묵직한 생명력을 얻는다. 2000년대 중반 아동 학대와 왜곡된 구원의 광기를 미스터리 연쇄 살인극의 틀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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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감상문 보기: [산업 폐기물 처리장 (내 아까운 2시간 물어내) #15] 이유도 안 알려주는 겉멋과 망조 든 결말의 환장 파티: 《종말의 끝 (How It Ends, 2018)》 No. 292 :: 4K 개봉기 아카이브

 

[산업 폐기물 처리장 (내 아까운 2시간 물어내) #15] 이유도 안 알려주는 겉멋과 망조 든 결말의 환

넷플릭스 썸네일에 포레스트 휘태커와 테오 제임스의 얼굴이 떡하니 박혀 있고, '미 대륙을 덮친 원인 불명의 재앙'이라는 문구가 보이면 누구라도 한 번쯤 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2시간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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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주의 방벽

본 리뷰는 <로스트> 시즌 4, 4화(Eggtown)까지의 내용만을 철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후 전개에 대한 어떠한 단서나 스포일러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현재 진행형' 리뷰이니 안심하고 감상해 주세요!

 

시즌 4의 롤러코스터는 쉴 틈이 없습니다! 4화 '에그타운(Eggtown)'은 도망자 케이트의 미래(플래시 포워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시청자들의 턱을 빠지게 만드는 시즌 4 최고의 반전 엔딩 중 하나를 선사합니다. 섬 안팎에서 벌어지는 기싸움과 거짓말이 극에 달하는 흥미진진한 에피소드입니다.

오세아닉 식스(Oceanic Six)로 귀환 후 재판대에 선 케이트. 잭은 왜 법정에서 엄청난 거짓말을 해야만 했나?
화려한 옷을 입고 법정에 선 케이트의 긴장한 모습

 

이번 화의 핵심 장면 (디테일과 연출) 이번 에피소드는 미래의 '케이트의 재판'과 섬 현재 시점에서의 '마일스와의 거래'가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법정에 선 케이트는 과거의 끔찍한 범죄들로 인해 중형을 선고받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압권은 엔딩 씬입니다. 기적적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난 케이트가 호화로운 저택에 돌아와 2층 방으로 향할 때, 시청자들은 숨을 죽이게 됩니다. 그녀가 "우리 아기(my baby)"라 부르며 안아 든 금발 머리 아이의 이름이 다름 아닌 '애런(Aaron)'이었기 때문입니다. 섬에 있던 클레어의 아기가 왜 미래에 케이트의 아들이 되어 있는지, 그 충격적인 시각적 반전은 에피소드 전체의 판을 뒤집어 버립니다.

벤을 이용해 320만 달러를 뜯어내려는 마일스. 그리고 그보다 더 자비 없는 리더 존 로크의 수류탄 경고.
입에 수류탄을 문 채 공포에 질린 마일스

 

캐릭터 심리 프로파일링 & 숨은 이스터에그

  • [심리 프로파일링] 잭의 완벽한 위증: 플래시 포워드에서 잭은 케이트를 변호하기 위해 증인석에 섭니다. 잭은 오세아닉 815편이 바다에 추락했으며, '오직 8명만 생존해 섬으로 떠밀려 왔고, 그마저도 2명은 죽었다'는 완벽한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뱉어냅니다. 정의롭고 정직하던 리더 잭이 법정에서 위증을 불사하는 모습은, 오세아닉 식스가 공유하고 있는 '거대한 은폐'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보여줍니다.
  • [이스터에그] "Eggtown"의 의미: 에피소드 제목인 에그타운은 꽤 중의적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로크가 섬에서 벤을 위해 달걀 프라이를 요리하는 장면을 뜻하지만, 암묵적으로는 케이트의 '임신(난자, Egg)'에 대한 두려움과 애런을 둘러싼 복잡한 모성애, 그리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껍질처럼 위태로운 생존자들의 상황을 은유하는 훌륭한 상징입니다.

미스터리 추적 일지 (현재 시점)

  • [신규 떡밥] 클레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애런이 미래에 케이트와 함께 섬 밖으로 나왔다면, 진짜 엄마인 클레어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오세아닉 식스의 거짓말 속 '죽었다는 2명' 중 한 명일지, 아니면 섬에 남겨진 것인지 거대한 미스터리가 추가되었습니다.
  • [현재 시점의 긴장감] 마일스의 320만 달러 청구서: 벤과 단둘이 남게 된 마일스는 벤을 생포해 넘기는 대신, "320만 달러를 주면 당신이 죽었다고 보고해주겠다"는 황당한 거래를 제안합니다. 이 화물선 사람들은 단순히 정체불명의 배후 세력이 내린 명령에 복종하는 척하면서도 각자의 시커먼 꿍꿍이를 품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 [국면 전환] 흑화하는 리더, 로크: 마일스가 벤과 접촉한 사실을 안 로크는 폭주합니다. 마일스의 입에 수류탄을 물리고 핀을 뽑아버리는 로크의 모습은 과거의 온화했던 철학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섬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점점 무자비하게 변해가는 로크의 흑화가 소름 돋게 그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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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사회적 사각지대를 조명하는 스릴러 영화는 현실의 아픔을 파고들 때 비로소 묵직한 생명력을 얻는다. 2000년대 중반 아동 학대와 왜곡된 구원의 광기를 미스터리 연쇄 살인극의 틀 안에 담아내려 했던 조의석 감독의 2006년작 《조용한 세상》을 웨이브(Wavve)를 통해 감상했다.

줄거리: 연쇄 소녀 피살 사건, 그리고 뜻하지 않게 찾아온 아이

서울 도심에서 어린 소녀들이 잇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는 엽기적인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희생된 아이들의 신원을 추적하던 강력계 김형사(박용우)는 살해당한 소녀들이 모두 지금은 문을 닫고 폐쇄된 보육시설 '천사의 집' 출신이라는 결정적인 공통점을 밝혀내고 수사망을 좁혀간다.

 

한편, 해외에서 주로 활동하며 가끔 귀국하던 전문 사진작가 류정호(김상경). 그는 다른 곳으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된 친척의 집에서 머물던 중, 친척이 입양 절차를 밟아 데려오기로 했던 어린 소녀 수연(한보배)과 뜻하지 않게 한집에서 지내게 된다.

 

과거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던 수연. 정호는 수연이 당시 사고로 각막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제때 치료받지 못할 경우 언젠가는 완전히 실명하게 된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다. 타인의 감정을 읽는 남다른 감각 때문에 사람과 거리를 두던 정호는 순수하지만 상처 입은 수연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지만, 보육원 출신 아이들을 노리던 범인의 마수가 수연에게까지 뻗치며 아이는 납치당하고 만다.

결말: 불타는 '천사의 집', 두 눈을 감싸 쥔 마지막 희생 (※ 스포일러 주의)

수연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추적을 이어가던 정호와 김형사는 마침내 연쇄 살인의 진범을 밝혀낸다. 범인은 다름 아닌 폐쇄된 '천사의 집' 여직원이었다.

 

과거 끔찍한 성폭행을 당해 심각한 정신병력을 앓고 있던 그녀는, 남자와 어른들의 폭력과 학대로 가득 찬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아이들이 더럽혀지기 전에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고통 없는 천국으로 보내줄 수 있다"는 광기 어린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폐쇄되어 인적이 끊긴 '천사의 집'으로 알고 지내던 보육원 출신 아이들을 납치해 차례로 목숨을 빼앗아 왔던 것.

 

정호는 홀로 폐쇄된 '천사의 집'으로 뛰어들어 수연을 구출하려다 범인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건물에 거센 화재가 발생한다. 정호는 수연을 안고 불길을 뚫고 탈출하려 하지만 무너져 내리는 불타는 건물 잔해에 깔려 옴짝달싹 못 하게 된다.

 

뒤늦게 화재 현장에 들이닥친 김형사가 잔해에 깔린 정호를 구하려 필사적으로 매달리지만, 당장 세 사람 모두 불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정호는 "수연이라도 먼저 데리고 나가라"고 소리친다. 결국 김형사는 수연을 안고 먼저 탈출한다.

 

화재가 완전히 진압된 후, 차갑게 식어버린 잿더미 잔해 속에서 류정호의 시신이 수습된다. 그는 불길 속에서 타 죽어가는 순간에도 오직 자신의 두 눈만을 두 손으로 꼭 감싸 쥐어 보호한 채 숨을 거두어 있었다. 실명 위기에 처해 있던 수연에게 자신의 각막을 온전히 물려주기 위한 정호의 눈물겨운 마지막 선택이었던 것. 이후 수연이 정호의 각막을 이식받아 세상을 보게 되었음을 암시하며 영화는 씁쓸하게 막을 내린다.

특별한 여운을 가로막은 무리수, 억지로 밀어붙인 각막 이식의 아쉬움

영화는 2000년대 중반 한국 사회의 곪아 터진 상처였던 아동 학대와 보육 시설의 그늘, 그리고 성폭력 피해 트라우마가 낳은 비틀린 연쇄 살인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다룬다. 김상경과 박용우의 탄탄한 연기 호흡과 차갑게 가라앉은 서스펜스는 수사극으로서 초반의 긴장감을 그럭저럭 끌고 간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뒤 솔직하게 다가온 감상은 "특별하게 깊은 여운이 남는 영화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아쉬움은 억지로 '각막 이식'이라는 신파적 소재를 결말에 밀어붙인 무리수에 있다. 정호가 수연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까지는 좋았으나, 굳이 아이의 과거 사고와 각막 손상, 그리고 실명 위기라는 극단적인 설정을 덧붙여 마지막 화재 현장에서 주인공이 '불타는 와중에도 눈만 손으로 가리고 죽어 각막을 물려준다'는 도식적인 희생 플롯으로 귀결시킨 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폐쇄된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상대로 벌어진 참극과 범인의 빗나간 구원관이라는 무거운 서스펜스를 뚝심 있게 파고들지 못한 채, 결말부 감정의 정점을 뜬금없는 각막 기증의 신파로 대체해 버리니 정통 스릴러로서 남겨야 할 사회적 충격이나 묵직한 울림이 힘없이 휘발되어 버린다. 소재의 무게감에 비해 억지스러운 설정의 봉합이 주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 작품이다.

비틀린 구원의 칼날과 '천사의 집'에 번진 화마.
그러나 억지로 끼워 맞춘 각막 이식의 무리수가 묵직한 여운을 가로막아버린 아쉬운 스릴러.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웨이브(Wavve) 스트리밍으로 감상했다. 2000년대 중반 한국 스릴러 특유의 서늘하고 우울한 공기는 뚜렷했으나, 설득력 있는 서사 대신 각막 이식이라는 억지스러운 희생으로 급하게 닫아버린 결말의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미완의 감상을 정리하며, 수장고의 [크레딧이 올라가도] 룸에 차분히 수납한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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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애국주의 판타지와 앙상한 외교적 논리로 가득 차 158분이라는 물리적 러닝타임 내내 관객을 시험에 들게 했던 강우석 감독의 2006년작 대작 《한반도》를 웨이브(Wavve)를 통해 감상했다. 어릴 적의 순진했던 도취를 지나 세상을 알고 난 뒤 마주했을 때 밀려오는 지독한 거부감과 씁쓸함이 가득하다.

어릴 적의 순진한 도취를 지나 마주한 지독한 거부감

영화를 보는 내내 한숨이 새어 나왔고, 솔직히 영화 보기가 진짜 힘들었던 작품 중 하나였다. 158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의 물리적인 피로감보다도, 영화가 다루는 소재와 강우석 감독 특유의 선동적이고 웅변조에 가까운 연출 스타일 때문에 견디기가 버거웠다.

 

문득 내가 한참 어린 나이에 이 영화를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초등학교 시절, 유선방송에서 방영해주던 '한강의 기적' 다큐멘터리를 보며 가슴 벅찬 애국심에 취해 우리 민족이 세계 최고의 국가라는 사실에 감격하고 고무되었던 그 시절이었다면, 아마 긴 러닝타임 따위는 잊은 채 별점 10점도 모자라다고 손뼉을 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을 알아버렸고, 결코 그런 순진한 나이가 아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 속 지극히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체득한 지 한참 지난 지금의 시선에서, 이 영화는 지독한 거부감만을 남긴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대놓고 낯부끄러운 중국식 관제 프로파간다와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이 불편함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냉혹하고 복잡다단한 국제 정세와 외교적 역학 관계를 '숨겨진 도장 하나 찾으면 모든 문제가 마법처럼 해결된다'는 유아기적 판타지로 치환해 버린 게으름, 그리고 관객을 향해 끊임없이 감정적 굴종과 민족주의적 결집만을 강요하는 폭력적인 연출 때문일 것이다. 성숙한 시선으로 마주하기엔 너무나 낡고 위태로운, 2000년대 거대 기획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도장 하나로 국제 정세를 뒤집겠다는 앙상한 유아기적 판타지.
어른이 되어 마주한 158분의 버거운 거부감.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웨이브(Wavve) 스트리밍으로 감상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배우들의 열연(조재현, 안성기, 문성근 등)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이성을 마비시키려는 듯 쏟아지는 강우석 감독 특유의 직설적인 웅변과 계몽주의는 끝내 피로감으로 귀결되었다. 어린 시절의 맹목적인 감정이 휘발된 자리에 남은 공허한 씁쓸함을 삼키며, 수장고의 [산업 폐기물 처리장 (내 아까운 2시간 물어내)] 랙에 격리 수납한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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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감상문 보기: [크레딧이 올라가도 #63] 폐쇄된 '천사의 집'의 불길과 연쇄 살인, 억지스러운 각막 이식이 남긴 아쉬운 마침표: 《조용한 세상 (The World of Silence, 2006)》 No. 289 :: 4K 개봉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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