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이 연출하고 이제훈과 최희서가 주연을 맡은 2017년작 《박열(Anarchist from Colony)》은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의 만행을 은폐하려던 일제 제국주의에 맞서 스스로 대역죄인을 자처했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실화를 다룬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무거운 역사적 비극과 법정 투쟁을 다루며 끝난 뒤에도 시대의 아픔에 대한 생각을 곱씹게 만드는 영화다.

줄거리: 관동대지진의 학살 은폐와 스스로 대역죄인이 된 불령선인
1923년 도쿄, 관동대지진으로 도시 전체가 쑥대밭이 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본 내각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을 저지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 자경단과 군경에 의해 6천 명이 넘는 무고한 조선인이 무차별 학살당하자,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하고 내각의 책임을 덮기 위해 일제 수뇌부는 시선을 돌릴 '거물급 희생양'을 물색한다.
인력거를 끌며 항일 아나키즘 단체 '불령사'를 이끌던 박열(이제훈)과 그의 시에 반해 동거를 시작한 일본인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불령선인 단속 과정에서 체포된다. 내각의 비열한 음모를 간파한 박열은 단순히 도망치거나 부인하는 대신,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 오히려 자신이 "황태자를 폭탄으로 암살하려 했다"고 자백하며 '대역죄인'의 타이틀을 스스로 짊어진다.

결말: 제국주의 법정을 조롱한 공판, 영원한 안식과 남겨진 사진 (※ 스포일러 주의)
예심판사 다테마스(김준한)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박열과 후미코는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일제의 위선과 천황제의 모순을 통렬하게 논파한다. 조선 예복을 입고 재판장에 서겠다는 박열의 요구가 관철되며 마침내 열린 대역죄 공판. 두 사람은 법정 한복판을 자신들의 사상 투쟁 무대로 삼아 제국주의 사법부를 거침없이 조롱하고 비판한다.
결국 두 사람 모두에게 사형 판결이 내려지지만, 일제는 민심 동요를 막기 위해 은사(감형)령을 내려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 그러나 후미코는 황제의 거짓된 자비를 조롱하며 은사증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발긴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어 영영 분리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미코는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자살로 발표)으로 생을 마감하고, 옥중에 홀로 남은 박열은 동지들을 통해 그녀의 사망 비보와 유골이 고향으로 보내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일제 취조실에서 함께 어깨를 맞대고 다정하게 찍었던 실제 흑백 사진 한 장과, 22년 2개월이라는 긴 옥고를 치르고 1945년 해방 후 석방된 박열의 훗날 행적이 자막으로 흐르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기대가 컸던 만큼의 아쉬움: 가벼운 톤과 진지의 급변이 빚은 불협화음
상당히 기대를 품고 감상했던 작품이었기에, 영화가 끝난 뒤 마주한 실망감과 낯섦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취조실에서 박열과 후미코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찍었던 실제 그 사진 한 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대의 처절한 아픔과 역사적 무게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지금의 나와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도록 뿌리가 되어준 역사적 사실과 독립운동의 궤적은 성역화라는 표현조차 거슬릴 정도로 당연히 그 이상의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다루는 소재 자체에 대해서는 누구도 함부로 흠집을 낼 수 없고 지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소재의 거룩함을 걷어내고 '영화 그 자체'로서만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이준익 감독 특유의 연출 호흡은 나와는 결이 썩 잘 맞지 않는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겼다. 아예 각 잡고 웃기는 순수 코미디 장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어정쩡한 코믹 요소를 틈틈이 끼워 넣어 인물과 상황을 한없이 가볍게 흩뿌려놓았는지 깊은 의문이 든다.
장난치듯 가볍고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로 일관하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비장하고 진지한 모드로 급변하는 널뛰기식 톤 앤 매너는 감정의 몰입을 거칠게 방해하며 심한 거부감을 유발했다. 물론 감독에게 그런 의도는 추호도 없었겠지만, 일제의 심장부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박열이라는 걸출한 실존 인물의 인간적인 면모와 위대한 행적을 도리어 가볍고 우스꽝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버린 뼈아픈 역효과가 아니었나 싶다.

사진 한 장에 응축되었던 묵직한 시대의 울림.
어정쩡한 유머의 잔재 속에 갇혀버린 비장미, 연출의 톤이 남긴 씁쓸한 불협화음.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넷플릭스(Netflix)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감상했다. 1920년대 도쿄의 시대상과 어두운 유치장 세트의 질감은 디지털 화면 속에서도 단정하게 전달되었으나, 톤의 부조화에서 오는 서사의 아쉬움까지 메워주진 못했다. 영화적 연출 호흡에 대한 짙은 아쉬움과는 별개로,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비극과 그 시대의 아픔을 다룬 묵직한 소재의 무게를 존중하여 수장고의 [크레딧이 올라가도] 랙 한편에 기록해 둔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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