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윌리엄 골딩의 1954년 동명 불멸의 고전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겨낸 피터 브룩(Peter Brook) 감독의 1963년작 흑백 걸작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핵전쟁의 포화를 피해 피난길에 올랐다 무인도에 표류한 영국의 어린 소년들이, 어른 없는 고립된 낙원에서 어떻게 문명의 규율을 내던지고 맹목적인 야만과 살인의 광기로 퇴행해 가는지를 다큐멘터리처럼 차갑고 건조하게 포착해 낸 문제작이다. 마지막 파도 앞에서 터져 나오는 소년의 통곡이 인간 본성에 대한 서늘하고 뼈아픈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인간의 원초적 얼굴을 마주하는 가장 잔혹한 방법은, 타락할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린아이'의 신체로부터 사회화의 외피를 박탈하는 일이다. 피터 브룩이 1963년에 완성한 〈파리 대왕〉은 윌리엄 골딩의 소설이 던졌던 세기말적 실존 질문을, 다큐멘터리 시네마 베리테의 거칠고 건조한 흑백 숏들 속에 가두어 둔 채 관객에게 차갑게 제시한다.
이 작품이 드러내는 가장 섬뜩한 진실은 악(惡)의 보편성이다. 우리는 흔히 야만과 폭력을 성인들의 몫, 혹은 세대의 단절이나 특정 계급의 타락으로 치부하려 든다. 그러나 브룩의 카메라는 성인과 유년 사이에 그 어떤 윤리적 안전지대도 존재하지 않음을 단호하게 폭로한다.

남태평양의 산호섬에 고립된 소년들은 영국의 모범적인 교복을 입고 소라를 불며 회의의 규율을 정립하지만, 그것은 교육이라는 인공적인 장치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던 얇은 막에 불과했다. 배고픔과 어둠의 공포, 그리고 '파리 대왕'이라 명명된 썩어가는 돼지 머리의 토템 앞에서, 소년들은 성인들이 전쟁터에서 그러하듯 너무나 손쉽게 사냥과 집단 린치, 그리고 살인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킨다. 교육과 사회화라는 인위적 훈련이 멈추는 순간 인간이 얼마나 순식간에 원시적 맹목성으로 회귀하는가를 목도할 때 발생하는 전율이다.

물론 소설이라는 거대한 텍스트의 숲에서 골딩이 구축했던 다층적인 알레고리와 인물들의 내면적 분열은, 영화의 물리적 시간과 아마추어 아역 배우들의 투박한 연기 속에서 다소 건조하게 축약된 인상을 남긴다. 문장이 주었던 묵직하고 신비로운 서스펜스는 필름의 표면 위에서 다소 도식적인 사건의 연쇄로 치환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종막이 지닌 침묵의 무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불타는 정글을 헤치고 해변에 엎드린 랄프의 눈앞에 나타난 정갈한 해군 장교의 백색 제복. 소년들을 꾸짖는 그 장교의 등 뒤에 정박한 순양함은, 결국 섬 밖의 '문명화된 어른들의 세계' 역시 더 거대한 무기와 살육의 광기(세계 대전)로 불타고 있음을 역설하는 가장 참담한 미장센이다. 친구의 죽음과 잃어버린 결백을 위해 모래사장에서 오열하는 랄프의 눈물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스크린 너머의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종(種)의 불완전성을 끝없이 되묻게 만든다.

산호섬의 낙원을 불태운 동심의 잔혹극.
얇은 문명의 가죽을 찢고 튀어나온 인간의 야만성과 지치지 않는 사회화의 절대성을 묻는 흑백의 냉정한 기록.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세계적인 예술 영화 레이블인 크라이테리언 컬렉션(The Criterion Collection)의 블루레이 디스크로 감상했다. 비록 별도의 패키지 언박싱 포스팅을 작성하지는 않았으나, 거친 16mm/35mm 흑백 필름의 입자감과 남태평양 섬의 눈부신 햇살, 소년들의 그을린 피부 위로 흐르는 땀방울의 질감을 크라이테리언 특유의 단단하고 정갈한 고화질 복원으로 완벽히 살려냈다. 인간 본성의 앙상한 바닥을 응시하게 만드는 서늘한 질문과 묵직한 여운을 품고 있기에, 수장고의 [크레딧이 올라가도] 랙 상단에 영구 보관한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이걸 왜 봐요? (근데 난 봄) #15] 지하 12,000m의 차가운 냉전 공포, 뒤엉킨 살점과 지루함 사이의 애
러시아의 아르세니 시우힌 감독이 연출한 2020년작 SF 바디 호러 영화 《슈퍼딥(Кольская сверхглубокая / The Superdeep)》. 냉전 말기 구소련이 지구 내부를 탐사하기 위해 실제로 팠던 '콜
4klog.tistory.com
★다음 감상문 보기: [크레딧이 올라가도 #50] 소진된 육체의 제단과 잠들지 않는 양심: 《머시니스트 (The Machinist, 2004)》의 윤리적 참회록에 관하여 No. 236 :: 4K 개봉기 아카이브
[크레딧이 올라가도 #50] 소진된 육체의 제단과 잠들지 않는 양심: 《머시니스트 (The Machinist, 2004)
브래드 앤더슨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크리스찬 베일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한계까지 갈아 넣어 완성한 2004년작 심리 미스터리 스릴러 《머시니스트(The Machinist)》. 1년 동안 단 1초도 잠들지 못
4klog.tistory.com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공감과 댓글로 응원 부탁드립니다!
4K 개봉기 아카이브는 수집가 디스크러버의 영화 감상과 물리매체 리뷰를 기록하는 블로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