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아르세니 시우힌 감독이 연출한 2020년작 SF 바디 호러 영화 《슈퍼딥(Кольская сверхглубокая / The Superdeep)》. 냉전 말기 구소련이 지구 내부를 탐사하기 위해 실제로 팠던 '콜라반도 초심도 시추공'과 그곳에서 흘러나왔다는 유명한 '지옥의 비명소리' 도시전설을 모티브로 삼았다. 지하 12km 폐쇄 공간에서 펼쳐지는 음산한 분위기와 후반부의 기괴한 살점 융합 크리처는 호러 마니아의 구미를 당기지만, 뒤로 갈수록 힘을 잃는 서사와 억지스러운 전개 탓에 추천하기는 애매한 영화다.

줄거리: 지하 12,000미터의 기괴한 소리와 감염의 시작
1984년 새해 전야의 소련. 역학 학자 안나 피오도로바(밀레나 라둘로비치)는 백신 임상 시험 도중 동료를 잃은 죄책감에 시달리던 중, 군 정보국 요원 유리 모로조프의 연락을 받는다. 북극권 콜라반도의 지하 12,000m 초심도 시추 시설에서 원인 불명의 기괴한 소리가 녹음되고 연구진들이 실종되는 등 이상 징후가 발생했으니, 현장으로 내려가 생체 표본을 확인하고 회수하라는 극비 임무였다.
안나는 특수부대 분대와 함께 헬기를 타고 혹한의 시추 기지에 도착한다. 하지만 기지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것은 공포에 질려 정신이 완전히 붕괴된 채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하는 한 연구원의 끔찍한 최후였다. 불길한 징조 속에 일행은 대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12km 최하단으로 직행하는 대신, 먼저 지하 약 5,000미터 지점에 위치한 직원 거주 및 생활 시설인 '리조트' 구역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최하단 시추 구역으로 가는 승강기로 환승해야 하는 구조였다.
리조트 구역에 진입한 이들은 시추 깊은 곳에서 가까스로 뛰쳐나온 한 여성 연구원을 발견해 구출한다. 그러나 이미 미지의 균류에 감염되어 있던 그녀로 인해 기지 내부에 무서운 속도로 곰팡이 포자가 퍼져나가며 본격적인 참극이 시작된다.

결말: 봉쇄된 승강기, 잇따른 희생과 엘리베이터 안의 비극 (※ 스포일러 주의)
정체불명의 미지의 균류는 숙주의 신경계를 장악하고, 인간들의 육체를 녹여 기괴한 거대 살점 덩어리로 융합시키는 치명적인 군체 생명체였다. 구출했던 감염 여성으로 인해 대원들 사이에 순식간에 감염자가 발생하고, 어둠 속에서 거대한 융합 괴물까지 들이닥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다. 생존자들은 사건을 비밀에 부치고(누군가 그것을 노리고 다시 위험한 일을 감행할 수도 있으니) 비감염자들만이라도 서둘러 지상으로 탈출하려 하지만, 지상과 리조트 구역을 연결하는 승강기 열쇠가 사라져 발이 묶이고 만다. 균류가 세상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구소장이 스스로를 희생하며 열쇠를 지닌 채 시설 깊숙이 격리 봉쇄를 감행했기 때문이다.
열쇠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대원들의 감염과 괴물의 습격이 잇따르며 탈출로는 번번이 가로막힌다. 초반에는 국가적 임무와 표본 확보에만 집착하던 유리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끝내 자신을 희생하며 막혀 있던 엘리베이터 열쇠를 확보해 안나에게 넘겨준다.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안나는 마침내 지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도달한다. 하지만 승강기 안에서 마주한 것은, 앞서 안나에게 끊임없이 어디 출신이냐며 질척대던(하나도 안 멋있고 나한테는 그렇게 보였다.) 동료 미헤예프(Mikheev)가 곰팡이 균류에 완전히 잠식되어 벽면과 바닥에 떡처럼 흉측하게 들러붙어 있는 참상이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미헤예프의 잔해와 접촉한 안나 역시 끝내 포자에 감염되고 만다.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해 그녀는 엘레베이터를 추락시키려 하지만(엘레베이터 작동 비밀번호 오류 3회면 추락하는 시스템) 거의 성공하던 차에 외부 인원들로부터 구출을 당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균류 감염을 막기 위해, 쥐고 있던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스스로 자폭하며 지옥의 포자를 눈보라 속에 영원히 묻어버린다.

빛바랜 초반의 기대감: 취향 저격 소재와 늘어지는 템포의 불협화음
SF 바디 호러와 밀폐 크리처물을 워낙 좋아하는 장르 팬이라 챙겨보았지만, 보고 난 뒤의 재미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사실 영화의 초중반부까지는 느낌이 무척 좋았다. 냉전 말기 소련 기지 특유의 차갑고 육중한 프로덕션 디자인, 12,000m라는 아득한 심연으로 내려가는 서늘한 하강감, 그리고 '지옥의 소리' 도시전설을 엮어낸 미스터리한 빌드업을 보며 "해당 장르의 러시아 영화 중에 드디어 하나 건졌구나!" 싶어 가슴이 뛰었다.
존 카펜터의 《더 씽(The Thing)》을 연상시키는 기괴한 균류 감염과 후반부 살점 융합체의 비주얼 자체는 B급 크리처 마니아로서 흡족할 만한 아날로그적 질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영화는 급격히 활력을 잃고 그저 지루해진다. 러닝타임이 불필요하게 늘어지는 데다, 엘리베이터 비밀 번호 오류 하나를 왜 그렇게 쉽게 해결하지 못하나 싶을 정도로 뒤로 갈수록 억지스러운 설정과 답답한 동선이 눈에 밟힌다. 밀폐 공간 스릴러 특유의 속도감을 살리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서사는 짙은 아쉬움을 남긴다. 내가 워낙 좋아하는 장르라 내치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좋은 영화다"라고 칭찬하기에는 낯간지러운, 지독히도 애매한 계륵 같은 작품이다.

지하 12,000미터 깊은 심연에 도사린 차가운 냉전의 공포와 뒤엉킨 살점들.
매혹적인 초반의 긴장감을 스스로 갉아먹은 늘어지는 템포와 억지 전개의 아쉬움.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웨이브(Wavve)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감상했다. 1080p 풀 HD 화질로 전달되는 시추 기지의 차가운 메탈릭 톤과 후반부 거대한 살점 융합 크리처의 그로테스크한 질감은 안방극장의 시각적 몰입감을 나름대로 살려주었다. 취향에 딱 들어맞는 매력적인 소재와 초반의 훌륭한 빌드업에도 불구하고, 후반부의 루즈한 템포와 억지스러운 전개 탓에 남들에게 권하기는 애매하지만 B급 호러 마니아로서 끝끝내 챙겨보게 된 작품이기에 수장고의 [이걸 왜 봐요? (근데 난 봄)] 랙에 올려둔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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