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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위어 감독의 1975년작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세계 영화사에서 가장 독특한 공기감을 가진 작품 중 하나다. 소녀들의 흔적 없는 실종이라는 기괴한 미스터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장르 영화 특유의 자극적인 서스펜스나 해답을 갈구하는 말초적 탐색을 과감히 소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가 던지는 기묘한 불쾌감은 장르적 장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눈부시게 아름다운 화폭과 시대를 앞서간 사운드스케이프의 빈틈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줄거리: 햇살 가득한 밸런타인데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소녀들

1900년 밸런타인데이, 호주의 엄격한 기숙학교인 앱플야드 칼리지의 학생들이 거대한 암석 지대인 '행잉록'으로 소풍을 떠난다. 정오를 가리키는 순간 모두의 시계가 일제히 12시에 멈추는 기묘한 현상이 발생하고, 전교생의 동경을 받던 아름다운 소녀 미란다(앤 루이스 램버트)를 비롯한 네 명의 여학생과 한 명의 수학 교사가 홀린 듯 바위 틈 사이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공기 중으로 증발해 버린다.

결말: 해답 없는 실종이 남긴 억압과 파멸 (※ 스포일러 주의)

며칠 후, 실종되었던 여학생 중 한 명인 이르마가 극적으로 구조되지만, 그녀는 그날 바위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결국 사건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고, 남겨진 이들은 서서히 미쳐가기 시작한다. 엄격한 빅토리아 시대의 규율로 가득했던 학교는 추문과 공포로 인해 급격히 몰락하고, 학생들을 억압하던 앱플야드 교장은 환상과 죄책감에 시달리다 결국 행잉록에서 추락사하며 비극적인 파멸을 맞이한다. 영화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눈부신 햇살 속으로 유유히 걸어가던 소녀들의 기묘한 잔상을 스크린에 박제하며 끝을 맺는다.

미스터리 스릴러의 문법을 지워낸, 담담하고 안타까운 실종의 기록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기묘한 지점은 '미스터리한 사건'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도, 관객에게 전혀 미스터리 장르 특유의 장르적 쾌감이나 긴장감을 선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피터 위어 감독은 단서들을 조합해 범인을 추적하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규명하는 데 관심이 없다. 카메라는 그저 낯선 대자연의 압도적인 풍광 속에 던져진 인간들의 나약함을 관조할 뿐이다. 덕분에 영화는 정교하게 짜인 스릴러라기보다, 그저 대자연의 품속으로 영영 사라져 버린 소녀들에 대한 담담하면서도 깊은 안타까움을 다루는 듯한 독특한 정조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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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의 명화 같은 미장센과 시대를 앞서간 앰비언트 사운드

영화의 시각적, 청각적 레이어는 이 작품을 단순한 고전 영화 이상의 예술적 반열에 올려놓는다. 회화적으로는 르네상스 거장 산드로 보티첼리의 명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극 중에서도 주인공 미란다를 보며 "보티첼리의 비너스 같다"는 감탄이 직접적으로 흘러나오듯,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이 눈부신 햇살과 우거진 수풀 사이를 거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기분 나쁘게 매혹적인 한 폭의 고전 회화다.

 

여기에 귀를 사로잡는 영화 음악 역시 독창적이다. 1970년대 중반에 나온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유행하던 전형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이나 자극적인 호러 사운드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팬플룻 선율과 어우러진, 마치 현대의 '앰비언트(Ambient)'나 '칠아웃(Chill-out)' 음악을 연상시키는 몽환적이고 정적인 사운드스케이프는 현실과 분리된 듯한 행잉록의 시공간과 묘하게 어우러지며 관객의 감각을 아득하게 마비시킨다.


"사실 미스테리한 사건이 이 영화의 주된 소재지만 영화는 전혀 미스테리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단순히 안타까운 실종 사건을 다루는 듯한 느낌. 또한 영화 음악조차도 전혀 70년대 느낌이 아닌 약간은 앰비언트나 칠 아웃 느낌의 음악이 영화와 묘하게 잘 어울린다. 또 회화적으로는 보티첼리(영화에서 미란다(앤-루이스 램버트)를 보며 보티첼리의 비너스같다는 표현이 나온다)의 명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사건의 해답을 구하는 대신, 명화의 스펙트럼과 몽환적인 멜로디에 취해 영원히 길을 잃고 싶어지는 서늘한 유혹.


 

💿 물리 매체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들이 거대한 바위 틈 사이로 아스라이 사라지던 잔상, 그리고 귀를 먹먹하게 채우던 앰비언트풍의 서늘한 선율이 상영이 끝난 방 안을 오랫동안 맴돈다. 장르의 도식을 배제했기에 오히려 더 기묘하고 아름다운 이 독보적인 텍스트를 갈무리하며, 오늘 밤의 상영을 책임져 준 크라이테리언 콜렉션(Criterion Collection) 해외판 블루레이 패키지를 조심스럽게 정리한다. 피터 위어 감독 특유의 소프트 포커스 미장센과 르네상스 회화 같은 색감을 아날로그 필름의 정취 그대로 복원해 낸 이 에디션은, 이미 블로그에 정성스러운 오픈 패키지 개봉기를 기록해 두었을 만큼 수집가로서 큰 애정을 품고 있는 보물이다.

[해외판 블루레이] 행잉록에서의 소풍 (1975, 피터 위어 감독) – 크라이테리언 콜렉션 개봉기 :: 4K 개봉기 아카이브

 

[해외판 블루레이] 행잉록에서의 소풍 (1975, 피터 위어 감독) – 크라이테리언 콜렉션 개봉기

· 1975년작 오스트레일리아 미스터리 영화, 크라이테리언 블루레이로 소장· 아름답고도 섬뜩한 분위기, 피터 위어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 고화질 리마스터 + 서플먼트 + 부클릿까지 충실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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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이 가시기 전 익숙하게 노션(Notion)을 열어 '본 영화 관리' 데이터베이스 창을 켠다. 사라진 소녀들의 눈부신 화사함 속에 감춰진 억압과 미지의 두려움을 인정하며, 망설임 없이 [기분나쁘게 아름다운 것들] 카테고리에 《행잉록에서의 소풍》의 문패를 달아준다. 비고란에는 '크라이테리언 블루레이의 완벽한 텍스처로 음미하는 호주 뉴웨이브의 마스터피스.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닮은 미란다의 미소, 그리고 70년대라고는 믿기지 않는 칠아웃풍 사운드가 자아내는 몽환적인 스크린의 틈새'라고 만족스럽게 타이핑한다. 나만의 물리 매체 진열장과 디지털 아카이브에 이 독창적인 예술적 파편을 온전히 보존하는 순간, 수집가이자 기록가로서의 든든한 포만감이 차오른다.


★이전 감상문 보기: [크레딧이 올라가도 #15] 숨 막히는 불쾌함이 선사하는 역대급 여운, 이창동이라는 지독한 세계: 《밀양 (2007)》 No. 105 :: 4K 개봉기 아카이브 

 

[크레딧이 올라가도 #15] 숨 막히는 불쾌함이 선사하는 역대급 여운, 이창동이라는 지독한 세계:

어떤 영화는 보는 내내 관객의 목을 서서히 조여온다. 스크린 너머로 뿜어져 나오는 정체불명의 불안감과 기분 나쁜 불편함 때문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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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감상문 보기: [포크 호러(Folk Horror)의 심연 #4] 대낮의 백야 아래 원천 봉쇄된 탈출구, 《위커맨》의 영리한 후예: 《미드소마 (2019)》 :: 4K 개봉기 아카이브

 

[포크 호러(Folk Horror)의 심연 #4] 대낮의 백야 아래 원천 봉쇄된 탈출구, 《위커맨》의 영리한 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오는 점프 스케어 없이, 눈이 멀 것 같이 새하얀 햇살 아래서 관객을 미치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아리 에스터 감독의 2019년작 《미드소마》는 밤이라는 장르적 안전장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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