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상업 영화계가 비극적인 근현대사를 다루는 방식은 종종 관객을 피로하게 만든다. 역사적 사실 그 자체가 지닌 무게감만으로도 충분하건만, 굳이 그 안에서 억지스러운 사랑 타령을 끼워 넣거나 작위적인 신파 코드로 눈물을 강요하다가 주객이 전도되는 촌극을 수없이 지켜봐 왔다. 하지만 오멸 감독의 《지슬》은 다르다. 이 영화는 내가 그동안 보아온 역사 소재 영화들을 통틀어 압도적으로 만족스러울 만큼 불순물 없이 '깔끔한' 태도를 유지한다.

신파를 배제한, 압도적으로 깔끔한 서사의 품격
구차하게 감동을 쥐어짜지 않고, 묵직하고 건조하게 비극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감독의 뚝심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숭고한 의식이 된다.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을 달래기 위해 영화 전체를 거대한 한 편의 제사처럼 구성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모셔와 따뜻한 감자(지슬)를 나누어 먹이는 숭고함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먹먹함을 남긴다.

연극 무대를 방불케 하는 동굴 속의 앙상블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단연 빛이 닿지 않는 서늘한 동굴(큰넓궤)로 피신한 마을 사람들의 묘사다. 밖에서는 토벌대의 총소리가 맴도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좁은 공간에 모여 앉아 집에 두고 온 돼지 밥을 걱정하고 소소한 농담을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더욱 가슴을 친다. 특히 제한된 공간의 특성을 살려낸 감독의 독특한 연출과 호흡은, 마치 스크린이 아닌 눈앞에서 숨소리까지 들리는 묵직한 정극(연극) 한 편을 관람하는 듯한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참혹한 역사의 실체: 동광리 큰넓궤 사건
영화 《지슬》은 제주 4.3 사건 당시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주민들이 겪은 비극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48년 11월, 군경 토벌대는 해안선 5km 밖의 산간 지대에 있는 모든 사람을 폭도로 간주해 사살하라는 무자비한 '소개령(초토화 작전)'을 내린다. 영문도 모른 채 산으로 쫓겨난 마을 사람들은 '큰넓궤'라는 좁고 깊은 천연 동굴로 숨어들었다.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차가운 동굴 속에서 두 달 가까이 감자로 연명하며 숨죽여 지내던 이들은 결국 토벌대에게 발각되었고, 이듬해 정방폭포 등지에서 무참히 집단 학살을 당하고 만다. 영화는 이 처참한 살육의 스펙터클을 자극적으로 전시하는 대신,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서로의 온기를 잃지 않으려 했던 가장 보통의 사람들을 묵묵히 조명한다.

흑백의 미학이 완성한 서늘한 비극성
오직 흑과 백의 명암비만으로 직조해 낸 영상미는 이 영화의 화룡점정이다. 화려한 색채를 과감히 지워낸 제주의 겨울 풍광은 한 폭의 처연한 수묵화처럼 다가오고, 동굴 속 일렁이는 횃불 아래 드러나는 주민들의 얼굴은 흑백영화 특유의 대비가 극대화되며 깊은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역사적 비극을 다루려면 이토록 서늘하고도 정갈해야 한다."
신파를 걷어낸 깔끔한 연출, 연극적인 몰입감, 그리고 서늘한 흑백의 미장센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4.3 사건이라는 우리 역사의 끔찍한 비극성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컬러 영화보다 더 선명하게 심장을 파고든다. 얄팍한 상업영화들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묵직한 교과서이자,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도 오래도록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드는 처연한 걸작이다.
💿 물리 매체 수집가의 덧붙이는 기록 이 영화는 개봉 이듬해인 2014년경 DVD로 한 차례 정식 발매된 적이 있으나, 지금은 중고 매물조차 구하기 힘든 절판 희귀본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이토록 압도적인 흑백의 명암비와 연극적인 미장센을 고해상도로 온전히 담아낸 블루레이나 4K UHD 매체가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 영화계의 크나큰 손실이다. 만약 훌륭한 화질의 물리 매체로 다시 발매된다면, 망설임 없이 장식장 한가운데를 내어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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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나쁘게 아름다운 것들 #10] 론 펄먼이라는 완벽한 영혼을 입은 붉은 악마: 《헬보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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