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관객의 영혼을 위로하지만, 어떤 영화는 관객의 진을 쪽 빼놓는다. 대만 뉴웨이브의 거장 에드워드 양의 《독립시대》는 명백히 후자에 속한다. 씨네필들 사이에서 극찬을 받는 마스터피스이자 나의 '에드워드 양 감독 입문작'이 된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솔직한 첫 감상은 감동보다는 '지독한 피로감'이었다. 명성만큼 대단한 영화인지, 아니면 그저 내 안목이 미달인지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다.

얽히고설킨 위선과 가식의 관계망
이야기의 템포는 초반부터 쉴 새 없이 몰아친다. 급격한 자본주의를 맞이한 90년대 타이베이. 부유한 재벌 2세 아킴과 약혼한 PR 회사 사장 몰리, 몰리의 밑에서 일하는 착하고 순종적인 절친 치치, 치치의 연인이자 고지식한 공무원 밍, 그리고 아킴의 돈을 뜯어내려는 아방가르드 예술가 버디까지. 영화는 몰리가 충동적으로 여직원 펑을 해고하면서 벌어지는 단 '2박 3일' 동안의 사건을 다룬다.
문제는 이들 중 누구 하나 솔직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원제인 'A Confucian Confusion(유교적 혼란)'이 암시하듯, 이들은 겉으로는 유교적 도덕과 끈끈한 우정을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끝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불륜을 저지르며 뒷담화를 깐다. 그야말로 위선과 가식으로 점철된 대환장 파티의 연속이다.

과부하를 유발하는 다중 주인공의 덫
흥미로운 관음의 재미를 주던 초반을 지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이 장점은 거대한 피로감으로 돌변한다. 메인 캐릭터가 한두 명이 아닌 데다, 얽히고설킨 인물들 모두가 각자의 이기심과 철학적 고민을 쉴 새 없이 쏟아내기 때문이다. 이 많은 인물들 하나하나의 감정선에 이입하고 그들의 복잡한 행동 동기를 쫓아가려다 보면, 중반부를 넘어서는 순간 관객의 뇌 용량은 과부하에 걸리고 만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감정을 의탁할 틈을 주지 않는 이 산만한 군상극은, 관객의 에너지를 서서히, 그리고 아주 확실하게 방전시킨다.

쉴 새 없는 수다와, 현실을 빼닮은 피로감
인물들의 티키타카와 철학적인 척하는 수다는 블랙 코미디로서의 타격감은 훌륭하지만, 현실에서 기 빨리는 인간관계를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서로를 연기하고 기만하는 모습을 지켜볼수록, 스크린 밖의 관객은 점점 지쳐간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는 날카롭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소모적이고 피곤한 것이다.

기 빨리는 촌극의 끝, 마침내 맞이한 '독립' (※ 결말 스포일러)
서로를 속고 속이던 2박 3일의 난장판이 지나가고, 마침내 인물들은 겹겹이 쓴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진다. 남의 눈치를 보며 좋은 연인, 착한 친구를 '연기'하느라 지쳐있던 치치와 밍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그들은 비로소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체면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진짜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결심한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가짜 삶을 끝내고 진정한 의미의 '독립(獨立)'을 선언하는 이 엔딩은 깊은 인상을 남기지만,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관객이 겪어야 했던 감정적 노동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안목의 문제가 아닌, 호흡과 취향의 차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진이 빠졌다고 해서 영화를 보는 안목이 부족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본래 현대 도시인들의 단절과 허무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데 선수이며, 특히 《독립시대》는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유독 인물들의 대사량이 폭주하고 호흡이 가쁜, 철저하게 '의도된 피로감'을 주는 작품이다.
"명작이라 불린다고 해서, 내게도 반드시 좋은 영화여야 할 의무는 없다."
어쩌면 이 영화는 머리로는 훌륭하다고 이해할지언정, 가슴으로는 품기 힘든 지독한 '취향'의 영역에 있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예술 영화의 거창한 명성에 주눅 들 필요 없이 "아, 메인 캐릭터 여러 명한테 감정이입 하려니 지치고 빡세네"라고 털어버리는 솔직함. 어쩌면 남의 눈치를 보며 연기하듯 살아가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 던지는 가장 통쾌하고 '독립적인' 감상이 아닐까.
💿 물리 매체 수집가의 덧붙이는 기록 피곤한 수다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90년대 타이베이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에드워드 양 특유의 계산된 프레임, 그리고 인물들을 가두는 듯한 건축학적 미장센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하고 아름답다. 2022년에 디지털로 정식 복원된 판본은 이 영화의 도시적인 색감과 서늘한 분위기를 가장 완벽하게 재현해 낸다. 비록 내용물은 기가 빨릴지언정, 거장의 시각적 성취를 소장한다는 측면에서 이 타이틀의 가치는 [물리매체(블루레이)] 카테고리에 충분히 기록해 둘 만하다.
[Unboxing] 독립시대 (A Confucian Confusion, 1994) - 노바미디어 풀슬립 1,000장 넘버링 한정판 개봉기 :: 4K 개봉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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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verview: 90년대 타이베이, 혼돈 속의 청춘들을 그리다대만 뉴웨이브를 이끈 거장 에드워드 양(Edward Yang) 감독의 날카롭고도 지적인 도시 희극, 블루레이 개봉기입니다. 국내 로컬 레이블의 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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