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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영화는 크레딧이 올라갈 때 짙은 여운을 남기지만, 어떤 영화는 풀리지 않는 묘한 갈증과 물음표를 남긴다. 손예진과 고수 주연의 영화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 (2009)》는 완벽하게 후자에 속하는 작품이다. 두 남녀의 비극적인 운명과 끔찍한 과거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난 후 가슴에 남는 것은 서늘한 카타르시스가 아닌 어딘가 헐겁다는 아쉬움이다.

처연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증발해 버린 서사의 깊이

영화의 미장센과 배우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확실히 시선을 사로잡는다. 서로를 지키기 위해 태양을 포기하고 하얀 어둠 속을 걸어야만 했던 미호(손예진)와 요한(고수)의 모습은 시종일관 차갑고 슬프게 스크린을 물들인다.

 

하지만 문제는 그 '분위기'를 지탱해야 할 서사의 뼈대다. 방대한 원작의 서사와 인물들 간의 복잡하게 얽힌 심리전을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속에 무리하게 우겨넣다 보니, 관객이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선택에 깊이 공감하고 동화될 만한 감정적 여백이 턱없이 부족하다. 캐릭터의 심연을 파고들기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처연한 이미지에만 과하게 의존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엇갈린 운명과 처절한 희생의 굴레 (※ 줄거리 및 결말 스포일러)

14년 전 발생한 밀실 살인 사건. 유력한 용의자였던 여인마저 사고로 위장된 죽음을 맞이하며 사건은 종결되지만, 당시 담당 형사였던 동수(한석규)는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세월이 흘러 과거 사건과 연관된 인물들이 하나둘 끔찍한 사고를 당하기 시작하고, 끈질기게 사건을 추적하던 동수는 피해자의 아들이었던 요한과 용의자의 딸이었던 미호가 모든 일의 배후에 있음을 직감한다.

어린 시절 부모들의 추악한 진실 앞에서 씻을 수 없는 살인을 저지르고, 서로의 빛과 그림자가 되기로 맹세한 두 사람. 요한은 미호가 양지에 서서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얀 어둠 속에서 그녀의 앞길을 방해하는 자들을 잔혹하게 제거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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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동수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요한은 미호의 완벽한 알리바이를 지켜주기 위해 허공으로 스스로 몸을 던진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요한 곁에서 동수가 미호에게 그를 아느냐고 묻지만, 미호는 끝내 "모르는 사람"이라며 차갑게 답한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하얀 원피스를 입고 에스컬레이터 위로 멀어지는 미호의 서늘한 뒷모습을 비추며 영화는 지독하게 쓸쓸한 마침표를 찍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게이고의 텍스트와 스크린의 불협화음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이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소설들은 특유의 치밀한 전개 덕분에 늘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유독 한국 영화로 각색된 작품들과는 묘하게 궁합이 맞지 않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앞서 관람했던 《방황하는 칼날 (2014)》이 남겼던 특유의 텁텁함과 이질감이 이번 《백야행》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크레딧이 올라가도 #2] 매서운 설원의 질감, 그러나 길을 잃고 차갑게 식어버린 복수: 《방황하는 칼날 (2014)》 No. 10 :: 4K 개봉기 아카이브

 

[크레딧이 올라가도 #2] 매서운 설원의 질감, 그러나 길을 잃고 차갑게 식어버린 복수: 《방황하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원작 소설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텍스트를 활자로 읽어 내려가는 것과, 매서운 강원도의 겨울을 뚫고 피를 흘리는 영상 매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분명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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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문제는 원작의 결함이 아니라, 활자가 가진 서늘한 상상력과 묵직한 디테일을 영상 언어로 압축해 내는 '각색의 한계'에서 오는 불협화음이 아닐까 싶다. 텍스트가 쌓아 올린 밀도 높은 감정선을 스크린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알맹이는 빠져버린 기분이다.

 

영화가 남긴 유일한 성과, 원작을 향한 갈증

결국 이 영화가 남긴 가장 큰 수확은, 스크린이 채워주지 못한 빈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기어이 원작 소설을 펼쳐보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하얀 어둠 속을 걸어야만 했던 두 남녀의 진짜 속마음과, 영화가 미처 다 담아내지 못한 그 치밀하고도 끔찍한 심연의 디테일은 아무래도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를 통해 직접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다.

 

영화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조만간 책장 한편에 꽂아둘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을 장바구니에 담으며 아쉬운 크레딧을 넘겨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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