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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극은 대개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담보로 한다. 하지만 제레미 솔니에 감독의 《블루 루인》은 관객이 기대하는 그 쾌감을 정면으로 거스르며, 복수라는 행위가 얼마나 무모하고 찌질하며 파괴적인지를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우리에게 남는 것은 승리의 환희가 아니라 제목 그대로 시리도록 푸른 폐허(Blue Ruin)뿐이다.

 

엉성한 '선빵'이 불러온 끔찍한 나비효과

이 영화의 주인공 드와이트는 우리가 흔히 보던 '존 윅' 같은 무적의 킬러가 아니다. 낡은 파란색 폰티악 자동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인 무력한 백수일 뿐이다. 어느 날 부모를 죽인 원수 '웨이드 클리랜드'가 가석방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무작정 달려가 어설픈 몸싸움 끝에 화장실에서 웨이드를 찔러 죽인다.

 

놀랍게도 이 통쾌해야 할(?) 복수는 영화 초반부에 싱겁게 끝나버린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총조차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평범한 남자의 엉성한 살인은, 중무장한 범죄자 집단인 클리랜드 가문 전체의 분노를 사며 돌이킬 수 없는 핏빛 전쟁의 서막을 열어젖힌다. 드와이트는 졸지에 자신의 하나뿐인 여동생과 조카들까지 살해 위협에 빠뜨리게 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하고도 구차한 생존 스릴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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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했다면 정당했을까: 밝혀진 진실과 무너진 명분 (※ 결말 스포일러)

영화를 보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있다. "만약 드와이트가 부모님이 살해당한 진짜 이유를 끝까지 알지 못했다면, 그의 이 외로운 복수는 과연 정당했을까?"

 

드와이트는 클리랜드 일가의 일원을 생포해 심문하던 중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한다. 자신이 죽인 웨이드 주니어는 부모님을 죽인 진짜 범인이 아니었다. 과거 드와이트의 아버지가 웨이드 시니어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고, 분노한 웨이드 시니어가 드와이트의 부모를 쏴 죽인 것이다. 웨이드 주니어는 그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버지가 감옥에서 죽지 않게 하려고 대신 죄를 뒤집어썼을 뿐이었다.

결국 드와이트는 제대로 된 사실관계조차 모른 채 엉뚱한 사람을 죽였고, 그 무지함 때문에 자신의 남은 가족마저 사지로 몰아넣은 셈이다.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그가 쥐고 있던 알량한 '정의'와 복수의 명분은 모래성처럼 비참하게 허물어진다.

 

복수극의 공통된 결말, 그 지독한 허무함

복수를 다루는 대부분의 영화는 결국 비슷한 결말에 도달한다. 가해자를 처단할지언정 주인공의 영혼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고, 텅 빈 허무함만이 남는다는 것. 《블루 루인》 역시 이 공식을 따르지만 그 여운은 훨씬 더 지독하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클리랜드 가문의 본거지에 쳐들어간 드와이트는 총격전 끝에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다. 피투성이가 된 채 엉망진창으로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드와이트는 살아남은 클리랜드 가문의 막내 소년 윌리엄을 차마 쏘지 못하고 살려 보낸다. 윌리엄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와 클리랜드 부인 사이의 불륜으로 태어난 자신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살해당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면, 이 외로운 복수는 정당했을까?"

 

피로 얼룩진 파국 끝에 남겨진 드와이트의 텅 빈 눈동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명분조차 희미해진 복수가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크레딧이 올라가도 가시지 않는 이 짙은 푸른색의 여운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인 복수가 얼마나 허망한 신기루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한다.

 

💿 물리 매체 수집가의 덧붙이는 기록 화려한 액션 대신 정교한 미장센과 서늘한 공기감으로 승부하는 인디 스릴러인 만큼, 《블루 루인》이 보여주는 독특한 질감의 영상미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서는 고해상도 물리 매체 감상이 필수적이다. 특히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색'의 농도와, 그와 대비되는 붉은 선혈의 강렬한 색채는 오직 디스크 매체에서만 느낄 수 있는 깊이가 있다. 이 처절하고도 감각적인 복수극의 패키지는 [물리매체(블루레이)] 카테고리에서 그 소장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다.

[Unboxing] 블루 루인 (Blue Ruin, 2013) - 북미 Anchor Bay 블루레이 개봉기 (+ 레어템 영접!) :: 4K 개봉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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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감상문 보기: [크레딧이 올라가도 #10] 명작의 무게에 짓눌릴 필요 없는, 지독한 '기 빨림'에 대하여: 《독립시대 (1994)》 No. 38 :: 4K 개봉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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