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어떤 스릴러 영화는 범인이 잡히고 사건이 해결되는 순간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하지만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1997년작 《큐어》는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불길한 마스터피스다. 점프 스케어나 잔인한 혈투 없이도, 이 영화는 런닝타임 내내 관객의 목을 서서히 조여온다. 일본 스릴러 특유의 기이하고 스산한 분위기는 스크린을 압도하지만, 헐리우드 영화에서 맛볼 수 있는 시원시원하고 깔끔한 결말을 기대했다면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듯한 답답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될 것이다.

낡은 병원이 뿜어내는 기이하고 서늘한 미장센

이 영화가 선사하는 '기분 나쁜 아름다움'의 팔할은 시각적인 공간 연출과 일상적인 청각의 왜곡에서 온다. 특히 후반부, 다카베 형사와 미스터리한 청년 마미야가 대치하는 의도적으로 연출된 '낡고 버려진 병원'의 미장센은 압도적이다. 녹슨 철문, 축축한 콘크리트 벽, 그리고 공허하게 울려 퍼지는 물방울 소리까지. 이 폐건물은 단순히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를 넘어, 이성을 잃고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다카베 형사의 내면(무의식) 그 자체를 시각화한 듯한 기괴한 공간감을 선사하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부재한, 지독한 찝찝함

다카베와 마미야의 숨 막히는 심리전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은 자연스레 명확한 해답을 원하게 된다. "도대체 마미야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왜 하필 X자로 목을 긋는가?" 그러나 감독은 끝내 친절한 해설이나 통쾌한 사이다 결말을 제공하지 않는다. 오히려 최면이라는 불확실한 매개체를 통해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일상 속에 숨겨진 억눌린 광기를 전염병처럼 퍼뜨릴 뿐이다. 시원시원하게 떡밥을 회수하고 깔끔하게 닫히는 결말을 선호하는 관객에게, 이 영화가 남기는 축축하고 찝찝한 뒷맛은 진한 아쉬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핵심 줄거리와 서늘한 전염의 결말 (※ 스포일러)

도쿄 도심, 피해자의 목에 'X' 자로 칼자국을 내는 엽기적인 연쇄 살인이 발생한다. 체포된 범인들은 평범한 교사, 경찰, 의사 등이며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자신이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동기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이 기괴한 사건을 쫓던 다카베 형사는, 사건들의 교집합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듯한 청년 '마미야'가 있음을 알게 된다. 타인의 억눌린 파괴적 충동을 최면으로 해방시키는 마미야와, 정신병을 앓는 아내를 돌보며 스스로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던 다카베의 숨 막히는 대립이 시작된다.

 

마미야의 교묘한 심리전에 서서히 잠식당하던 다카베는, 결국 버려진 낡은 병동에서 그를 총으로 쏴 죽인다. 그러나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마미야의 죽음은 곧 다카베의 완전한 흑화(혹은 역설적인 치유)를 의미했다. 영화의 마지막, 다카베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평온한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그를 응대하고 돌아선 종업원이 갑자기 주방에서 칼을 집어 들고 화면 밖으로 걸어 나가는 섬뜩한 장면이 이어지며, 다카베가 마미야를 대신하는 새로운 '광기의 전도자'가 되었음을 암시한 채 영화는 불길하게 막을 내린다.


"시종일관 일본식 기이한 분위기는 좋았지만(특히나 의도적인 낡은 병원) 시원시원하고 깔끔한 맛이 안 난다는 게 아쉽다."

 

통쾌한 사이다를 기대하고 마셨다가, 목구멍에 끈적하게 달라붙는 정체불명의 심해수를 들이켠 기분. 명확한 해답 대신 끝없는 찝찝함을 남기는 것, 그것이 바로 구로사와 기요시가 설계한 가장 완벽하고 불쾌한 최면술이다.


💿 물리 매체 수집가의 덧붙이는 기록 《큐어》처럼 화면의 여백과 앰비언트 사운드(라이터 불꽃 소리,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중요한 영화는 물리 매체로 감상할 때 그 진가가 100% 발휘된다. 스트리밍 환경에서는 뭉개지기 쉬운 1997년작 특유의 거친 필름 그레인과, 정적을 찢는 미세한 소음들을 비압축 사운드로 온전히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상을 마치고 노션(Notion)에 구축해 둔 나만의 영화 데이터베이스를 열어 이 작품의 감상란을 채운다. '시각을 압도하는 낡은 병원의 미장센'이라는 찬사와 함께, '깔끔한 맛은 1도 없는 극강의 찝찝함'이라는 코멘트를 남겨둔다. 랙에 꽂힌 이 타이틀의 등을 볼 때마다, 귓가에 라이터 켜지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릴 것만 같다.

 

[플레인아카이브 4K UHD한정판] 큐어 – “조용한 광기의 공포, 가장 우아하게 포장된 심리 스릴러” :: 4K 개봉기 아카이브

 

[플레인아카이브 4K UHD한정판] 큐어 – “조용한 광기의 공포, 가장 우아하게 포장된 심리 스릴러

·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대표작, 국내 첫 4K 한정판 발매.· 플레인아카이브의 시그니처 감성, 렌티큘러부착 풀슬립 + 디지팩 구성.· Dolby Vision + DTS-HD MA 5.1로 공포의 밀도를 높인 사운드.· 구성

4klog.tistory.com


이전 감상기 보기: [괴수물의 코미디 재해석] 영 프랑켄슈타인 추천 – B급 감성으로 빚은 흑백 유머의 고전

다음 감상기 보기: https://4klog.tistory.com/49

 

[MCU 입문기] 어벤져스 추천 – 왜 사람들이 마블에 열광하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 뒤늦게 찾아온 MCU 입문작. · ‘히어로 연합’이 보여주는 단순하지만 명확한 쾌감. · 왜 다들 어벤져스에 열광하는지, 이제는 알겠다. · 다시 큰 화면으로 보고 싶은 블록버스터의 진수.솔직

4klog.tistory.com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공감과 댓글로 응원 부탁드립니다!
4K 개봉기 아카이브는 수집가 디스크러버의 영화 감상과 물리매체 리뷰를 기록하는 블로그입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