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태생부터 무거운 짐을 지고 출발한다. 마크 웹 감독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012)》이 딱 그렇다. 샘 레이미 감독의 기존 트릴로지 4편 제작이 무산되자, 소니 픽처스는 스파이더맨의 영화화 판권을 유지하기 위해 급박하게 리부트 시리즈를 출범시켜야만 했다. 그렇게 탄생한 이 새로운 스파이더맨은 기존 시리즈와의 차별화를 위해 '부모님의 비밀'이라는 미스터리 요소와 풋풋한 하이틴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웠다. 매끈한 액션과 훌륭한 비주얼을 자랑하지만, 감상을 마치고 나면 어쩔 수 없는 묘한 아쉬움이 혀끝에 맴도는 독특한 블록버스터다.

피터 파커 부모님의 미스터리, 그 자체로 훌륭한 차별점
이 리부트작이 내세운 가장 큰 승부수는 바로 피터 파커의 부모님, 리처드와 메리 파커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것이다. 전작들이 '큰아버지의 죽음'에만 서사의 방점을 찍었던 것과 달리, 아버지가 남긴 낡은 가방과 오스코프 사의 비밀 공식을 추적해 나가는 과정은 꽤나 흥미로운 미스터리 스릴러의 구성을 띤다. 피터가 왜 부모님에게 버림받아야 했는지, 그 과거의 조각들을 하나씩 맞춰가는 서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한 가치를 증명해 낸다.

훌륭한 케미스트리, 그러나 지울 수 없는 불만족의 정체
주연을 맡은 앤드류 가필드와 엠마 스톤의 연기 앙상블은 역대 최고라 불릴 만큼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영화 전반에 깔린 어딘가 불만족스러운 뉘앙스는 숨기기 어렵다. 판권을 방어하기 위해 다소 쫓기듯 제작된 배경 탓인지, 아니면 이전 트릴로지의 거대한 그림자를 억지로 지워내려 한 강박 때문인지 서사의 이음새가 종종 삐걱거린다. 이런 태생적 한계와 과도한 떡밥 투척은 결국 후속작인 2편에서 과도한 빌런 설정으로 무너지며 시리즈 전체가 중단되는 뼈아픈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물론 훗날 마블과의 협업을 통해 앤드류 가필드의 스파이더맨이 눈물겹게 재조명받게 되지만 말이다.)

1인칭 시점(POV)이 선사하는 날렵한 웹 스윙의 쾌감
서사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시각적인 쾌감만큼은 [멀티플렉스의 유령들] 카테고리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체조 선수처럼 훌쩍하고 날렵해진 스파이더맨의 피지컬, 그리고 무엇보다 빌딩 숲을 활강할 때 등장하는 1인칭 시점(POV)의 웹 스윙 씬은 놀라운 속도감과 아찔한 고도감을 선사한다. 거미줄이 뿜어져 나올 때마다 들리는 기계식 웹슈터 특유의 찰칵거리는 마찰음과, 거대한 파충류 괴물 '리자드'와의 묵직한 육탄전은 팝콘 무비로서의 타격감을 확실하게 책임진다.

영화 줄거리와 비극적 약속 (※ 스포일러)
어릴 적 부모님에게 버림받고 삼촌 내외와 자란 아웃사이더 고등학생 피터 파커. 우연히 아버지의 낡은 서류 가방을 발견한 그는 아버지의 옛 동료였던 오스코프 사의 '커트 코너스' 박사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방사능 거미에게 물려 초인적인 힘을 얻은 피터는, 삼촌의 억울한 죽음을 계기로 진정한 영웅 '스파이더맨'으로 각성한다. 한편, 코너스 박사는 피터가 건넨 아버지의 공식을 이용해 자신의 잘린 팔을 재생하려다 이성을 잃고 끔찍한 파충류 괴물 '리자드'로 변해버리고 만다.
도심을 파괴하려는 리자드를 막기 위해 피터는 오스코프 타워에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이 과정에서 연인 그웬의 아버지인 스테이시 반장이 치명상을 입고, 그는 죽어가며 피터에게 "그웬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서 멀어져 달라"는 슬픈 유언을 남긴다. 사건이 일단락된 후, 피터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웬과 거리를 둔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수업 시간, 지키지 못할 약속이 제일 재밌는 거라며 그녀에게 다시 다가갈 것을 암시하는 피터의 미소와 함께 영화는 여운을 남기며 막을 내린다.
"피터 파커의 부모님에 대한 존재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볼만했음. 그래도 뭔가 불만족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판권 방어라는 어른들의 사정 속에 급조되었지만, 매력적인 배우들과 훌륭한 고공 액션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힘겹게 증명해 낸 비운의 수작. 그 묘한 불만족스러움조차 이제는 이 시리즈만이 가진 애틋한 매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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