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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은 제임스 카메론의 《어비스》를 필두로 수많은 심해 배경의 SF 영화들이 쏟아져 나온 해였다. 그중 조지 P. 코스마토스 감독의 《레비아탄》은 대놓고 리들리 스콧의 《에이리언》과 존 카펜터의 《괴물(The Thing, 1982)》을 심해로 끌고 들어와 얼기설기 기워낸 얄팍한 크리처물이다. 밀폐된 심해 기지라는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 훌륭한 무대를 갖춰놓고도, 영화는 내내 오리지널 명작들의 겉핥기식 카피에 머물며 아쉬움만을 남긴다.

훌륭한 재료를 낭비해 버린 엉성한 서사

이야기의 발단 자체는 흥미롭다. 해저 4,800미터 아래에서 작업하던 대원들이 우연히 침몰한 소련 잠수함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챙겨 온 보드카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유전자 변이가 시작된다는 설정. 하지만 영화는 이 매력적인 설정을 존 카펜터의 《괴물》이 보여주었던 숨 막히는 심리전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누가 감염되었는지 모르는 극도의 불신과 공포 대신, 그저 순서대로 괴물로 변하고 어설프게 도망치는 일차원적인 슬래셔 무비의 공식을 밟으며 스스로 긴장감을 갉아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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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그림자에 짓눌린 열화판 크리처

이 영화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은 단연 크리처의 묘사다. 희생자들을 흡수하여 얼굴과 신체가 몸통에 기괴하게 융합되는 괴물의 디자인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존 카펜터의 《괴물》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괴물》이 남긴 시각적 충격과 뼛속까지 시린 미지의 공포에 비하면, 《레비아탄》의 괴물은 특수효과 거장 스탠 윈스턴이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엉성하고 작위적이다. 명작의 훌륭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감독의 얄팍한 연출력 탓에 제대로 요리되지 못한 채 쉰내가 나버린, 그야말로 '상한 맛'의 크리처가 되어버렸다.

스릴러를 포기하고 B급 오락 액션으로 도망치다

서늘한 SF 호러를 표방하던 영화는 결말부에 이르러 뜬금없이 B급 오락 영화의 텐션으로 급선회한다. 바다 위로 탈출한 주인공 벡(피터 웰러)이 구조를 외면했던 악덕 기업 CEO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넣고, 끈질기게 쫓아온 괴물의 입속에 폭약을 쑤셔 넣어 산산조각 내버리는 엔딩 씬. 분명 속이 뻥 뚫리는 통쾌한 장면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치밀한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데 실패하고 단순한 킬링타임 팝콘 무비로 도피해 버렸음을 증명하는 씁쓸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존 카펜터 감독의 괴물(The Thing, 1982)의 상한 맛이다. 뭔과 괴물 생각은 나지만 영화는 그에 비해 한참 모자르다."

 

걸작을 모방하려 했던 수많은 아류작들이 겪는 흔한 패착이다. 존 카펜터의 《괴물》이 선사했던 압도적인 공포를 기대하고 본다면, 이 눅눅하고 엉성하게 발효된 '상한 맛'에 깊은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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