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독: 아벨 페라라 (Abel Ferrara)
- 출연: 릴리 테일러, 크리스토퍼 월켄, 아나벨라 시오라
- 개봉 연도: 1995년

[The Opening Call]
"We are not sinners because we sin. We sin because we're sinners."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라, 본래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다)
[The Scene] 90년대 뉴욕의 더러운 뒷골목을 관통하는 거친 흑백 필름의 질감. 피비린내 나는 폭력과 살육을 다루면서도 화면은 시종일관 창백하고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흑과 백의 극단적인 명암 대비는 인간 내면의 빛(이성)과 어둠(본능)을 시각화하는 훌륭한 도구로 기능한다. 웅장한 고딕 저택의 음산함 대신, 현대의 삭막한 콘크리트 골목과 먼지 쌓인 도서관을 배경으로 삼은 이 우울한 미장센은 묘하게 현학적이면서도 불쾌한 탐미주의를 완성한다.
[The Narrative]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캐슬린은 어느 날 밤 뒷골목에서 뱀파이어 카사노바에게 물린 후 흡혈귀로 변모한다. 육체적 굶주림(피)과 지적 허기(철학적 사유) 사이에서 극심한 고뇌를 겪던 그녀는, 니체와 키르케고르를 탐독하며 자신의 악행과 폭력성을 정당화하려 애쓴다. 흡혈은 전염병처럼 번져나가고, 그녀의 학위 수여식 축하 파티는 결국 캐슬린이 초대한 교수와 지인들의 피를 탐하는 끔찍하고 기괴한 집단 학살의 현장으로 변모한다. 핏빛 향연의 끝, 치명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간 캐슬린은 수녀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죽음(혹은 구원)을 맞이하고, 무덤에 꽂힌 십자가를 비추며 영화는 서늘하게 끝을 맺는다.

[The Persona]
- 캐슬린 (릴리 테일러): 지식과 이성으로 인류의 폭력성(홀로코스트 등)을 이해하려 했으나, 결국 본능적인 욕망(어딕션)에 굴복하고 마는 현대 지성인의 위선적 초상. 뱀파이어가 된 후 철학적 수사를 통해 살육을 합리화하는 그녀의 모습은 지적 허영의 끝을 보여주는 서늘한 피사체다.
- 페이나 (크리스토퍼 월켄): 이미 자신의 흡혈 본능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관조하는 단계에 이른 고위 뱀파이어.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화면을 장악하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뿜어내며, 캐슬린에게 '본성의 수용'이라는 서늘한 진리를 설파하는 이 영화의 철학적 앵커로 활약한다.

[The Edge] 뱀파이어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르고 실존주의 철학을 논하는 아벨 페라라의 시도는 영화사적으로 무척 독창적이며, 부티크 물리 매체 수집가의 장식장에 꽂힐 만한 컬트적 가치가 충분하다. 그러나 이 지적이고 건조한 접근 방식은 양날의 검으로 작용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성과 본능의 충돌'이라는 비슷한 궤적을 그리면서도, 종교적 죄의식과 핏빛 욕망을 훨씬 더 농밀하고 감각적인 미장센으로 폭발시킨 박찬욱 감독의 《박쥐 (2009)》에 기꺼이 손을 들어주고 싶다. 《어딕션》의 철학적 사유가 머릿속을 창백하게 맴도는 지적 유희라면, 《박쥐》가 보여준 뱀파이어 신부의 탐미적인 파국은 심장에 날카롭게 꽂히는 원초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The Verdict]
- 고딕 지수: ★★★☆☆ (전통적인 성벽을 허물고 철학을 쌓아 올린 현대의 창백한 고딕)
- 탐미 지수: ★★★★☆ (지적 허영을 해체하는 흑백의 우아한 폭력성)
- 한 줄 평: 송곳니로 실존주의를 파헤치는 흥미로운 해부학 시간, 그러나 내 혈관을 더 뜨겁게 달군 것은 상현의 핏빛 갈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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