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영화 <렙티리카 (Лептирица, 1973)>의 물리매체에 수록된 부가영상을 보고 개인적으로 정리한 영화 제작과 관련된 비하인드 이야기입니다. 사실 렙티리카라는 영화에 대해서 아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나름 신경써서 정리한 글입니다.
1970년대 동유럽 장르 영화의 암흑기를 관통했던 거장이자, 서유럽 고딕 호러의 진부한 문법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슬라브 신비주의를 구축한 감독 조르제 카디예비치(Djordje Kadijevic). 그가 이번 블루레이 부가영상 인터뷰를 통해 세르비아 영화사에 전무후무한 궤적을 남긴 걸작 <렙티리카(Leptirica, 1973)>의 투쟁 같았던 제작 현장과 연출 내막을 낱낱이 공개했습니다.
단순한 TV용 일회성 호러물인 줄 알았던 이 작품이 어떻게 당대 정권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격조 높은 '정통 환상 판타지(Fantasy)' 명작으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 그 아찔하고 흥미로운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정리해 드립니다.
“빨치산이 없는 전쟁 영화” 정권 관리들의 청천벽력
감독은 1960년대 후반, 본인이 간신히 살아남았던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바탕으로 데뷔 초 여러 편의 전쟁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당연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카메라를 들었지만, 촬영 직후 제작진은 정권 관리들로부터 아찔한 압박을 받게 됩니다. 당시 정권을 감시하던 관리들이 영화 속에 "영웅적인 빨치산 전사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극도의 혐오감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 것이죠.
체제가 원하는 프로토콜을 거부한 채, 반역자나 범죄자, 적군으로 규정된 패배자들 사이에서 인간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그대로 노출시켰던 카디예비치 감독은 결국 당국으로부터 일종의 '특별 관리 대상'으로 찍혀 철저한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좋다, 더는 전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 대신 동화를 만들기 시작하겠다. 하지만 나리들, 이 동화들은 당신들을 아주 겁에 질려 기절하게(Scare you shitless) 만들 것이다."
계획된 전쟁 3부작의 마지막 편마저 예산 부족과 장르 프로필 불일치라는 핑계로 거절당하며 "더는 영화를 못 만들 것"이라는 부드러운 퇴출 통고를 받았을 때, 감독이 찾아낸 영리한 돌파구는 '장르의 급진적 전환'이었습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문학이나 영화계에 아무런 전통도 없던 환상 장르에 과감히 도전한 것이죠. 그는 본인의 미술사학 교수로서의 방대한 지식과 내재된 아나키즘 정신을 결합해 세르비아 최초의 본격 판타지 공포 영화 <렙티리카>를 멋지게 출범시켰습니다.

관객은 감쪽같이 속았다, 천사의 얼굴을 한 사탄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의 기괴한 흡혈귀 연출에 주목할 때, 조르제 카디예비치가 커리어 사상 가장 자랑스럽게 고백한 마스터피스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서유럽 가톨릭 도상학에 대한 통렬한 반기입니다. 그는 무르나우의 고딕 양식이나 라틴계 판타지가 흔히 묘사해 온 사탄, 즉 돼지 주둥이나 꼬리, 거대한 성기와 발톱을 달고 침을 흘리는 투박한 괴물 형상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대신 슬라브족 특유의 상대주의적 관점을 동원하여, 악마 혹은 타락천사를 가장 아름다운 천사의 아우라를 지닌 존재로 묘사하는 극사실주의 심리 기법을 구현해 냈습니다. 얼굴을 흉측하게 부풀리는 일반적인 호러 분장 스타일을 배제하고, 눈부신 미장센 뒤로 영적인 공포를 숨겨두는 치밀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 영적인 공포의 본질: 사탄이 지닌 진짜 무서움은 말초적인 신체 훼손이 아니라, 인간을 영적으로 정교하게 공격해 들어오는 신비주의적 능력에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 완벽한 기만의 카타르시스: 정작 극장에서 천사 같은 처녀의 충격적인 변신을 목격한 수많은 관객들은 이것이 악마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습니다.
아티스트에게는 다소 서운할 수 있는 결과지만, 감독은 오히려 "악마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믿지 않을 때 가장 행복해한다"는 민간의 격언을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증명해 내며 관객을 기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야외 시장을 뒤흔든 대소동, 그리고 부모들의 항의
영화 후반부, 관객의 심리를 진하게 자극하는 흡혈귀의 충격적인 실체는 단순한 시각 효과가 아닌 정교하게 계산된 연출이었습니다. 장인 정신이 스크린 밖으로 고스란히 전달된 탓일까요? 영화가 TV 프리미어로 처음 방영된 다음 날 아침, 카디예비치 감독이 야외 시장에 가자마자 그야말로 엄청난 소동이 목격되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이 무시무시한 작품을 만든 장본인이 바로 옆에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공포에 질려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이죠.
"일간지 신문들 역시 저를 옹호하는 진영과 공격하는 진영으로 나뉘어 뜨겁게 대립했는데, 그중에서도 학부모들의 항의가 가장 거셌습니다. 학교 교과 과정에 포함된 사실주의 문학 작가 밀로반 글시치의 고전을 자녀들에게 교육용으로 보여주려고 TV 앞에 앉혔다가,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못 했던 초자연적 공포와 기괴한 비주얼을 마주하는 청천벽력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감독은 공간의 대기 장치와 인물의 마스크를 집요하게 활용하며 화면을 길게 늘어뜨립니다. 후속작 <스티체니크(1980)>에서는 정교회 성상화(Icon) 속에서 막 걸어 나온 듯한 독특한 분위기의 신인 배우 밀란 미하일로비치를 발탁하는 집요함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판타지 요소를 미장센 전면에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인간 내면 깊숙한 곳을 완전히 뒤흔드는 연출은, 관객에게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지적 엘리트주의 영화의 정수를 완벽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물리매체를 소장해야만 하는 이유, 부가영상의 가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이반 라오스가 대본을 보고 "내 글을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며 불만을 터뜨렸을 때, "내가 당신 글이나 옮기는 삽화가인 줄 아느냐"며 면전에서 받아쳤던 조르제 카디예비치 감독. 단순한 잔혹 동화 수준에 머물지 않고 이데올로기의 이면과 인간의 실존론적인 고뇌, 그리고 슬라브족 특유의 역사적 배경을 세련되게 결합해 유고 영화사에 독보적인 궤적을 남긴 마스터피스가 바로 <렙티리카>입니다.
매끈하고 자극적인 서유럽식 가짜 공포에 지쳤다면, 황무지에서 뼈를 깎는 아날로그 연출로 거장이 완성해 낸 이 탁월한 실루엣과 정교한 정교회 고딕 질감의 디테일을 보시길 권합니다. 그의 숨겨진 사투와 인터뷰 비하인드를 알고 나면, 화면에 흐르는 음산한 대기 한 줄기조차 완전히 새롭게 보이게 될 테니까요.
[해당 내용은 아래의 물리매체 부가영상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Unboxing] 렙티리카 (Leptirica, 1973) - 포크 호러 박스셋 Disc 3 개봉기 :: 4K 개봉기 아카이브
[Unboxing] 렙티리카 (Leptirica, 1973) - 포크 호러 박스셋 Disc 3 개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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