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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영화 <렙티리카 (Лептирица, 1973)>의 물리매체에 수록된 부가영상을 보고 개인적으로 정리한 영화 제작과
관련된 비하인드 이야기입니다. 사실 렙티리카라는 영화에 대해서 아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나름 신경써서 정리한 글입니다.

 

오디션도 없었던 번개 같은 캐스팅, 운명처럼 찾아온 미하일로의 시작

오늘날의 정교하고 세분화된 영화 제작 환경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지만, 1972년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방송 제작 시스템은 사뭇 낭만적이면서도 극적인 구석이 있었습니다. 당시 연극영화과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젊은 배우 밀란 미하일로비치에게 <피보호자(Štićenik)>라는 인생의 전환점은 그야말로 어느 날 아침 운명처럼 찾아왔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에 눈을 떠 일간지를 펼쳐 들었던 그는 신문 뒷면 구석에서 조르제 카디예비치 감독이 TV 벨그레이드의 새로운 호러 시리즈의 촬영에 돌입한다는 작은 기사를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브란코 플레샤를 비롯한 당대의 대배우들과 함께 주연으로 낙점되었다는 '밀란 마노일로비치'라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젊은 배우의 이름을 보며, 그는 자신과 동시대에 활동하는 또래 중 그런 인물이 누구인지 심한 의문과 묘한 호기심을 가졌다고 회고합니다.

"내 동기들을 전부 아는 내가 왜 그 젊은 동료를 모를까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신문에 촬영 소식이 대대적으로 보도된 바로 그날 오후에 제게 캐스팅 전화가 왔습니다. 알고 보니 신문사 측에서 제 이름을 잘못 기재했던 것이었죠. 저는 별도의 오디션이나 캐스팅 단계도 거치지 않고, 그렇게 기사를 본 당일 곧바로 운명처럼 미하일로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벨그레이드 TV의 편성 책임자였던 필립 다비드의 단편 소설 <미하일과 그의 사촌>을 원작으로 삼아 조르제 카디예비치 감독이 직접 각색한 이 작품에서, 밀란 미하일로비치가 마주한 첫 촬영의 기억은 다름 아닌 '폭주'였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끝없는 질주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끝없는 질주 속에 숨겨진 본질, '검은 옷의 사내'가 상징하는 실존적 공포

영화 속에서 주인공 미하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고 또 도망칩니다. 촬영 첫날부터 배우가 소화해야 했던 것은 얇은 셔츠 한 장을 입고 숲과 거리를 끊임없이 달리는 일이었는데, 정작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 젊은이를 쫓는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관객에게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러티브적 모호함 때문에 개봉 당시 평론가들은 영화의 플롯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하지만 배우 밀란 미하일로비치는 이 작품의 진정한 서스펜스가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하며, 결말에 이르러서야 모든 안개가 걷힌다고 설명합니다.

"평론가들은 당시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미하일로를 쫓던 '검은 옷의 사내'의 정체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명확해집니다. 그 사내는 다름 아닌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 모든 인간을 예외 없이 쫓아다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중 누구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이며, 오직 우리 각자가 그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본질을 영화는 찌르고 있습니다."

 

작품 속 미하일로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한 이후에도 그 검은 옷의 사내에게 이끌려 가게 됩니다. 영화는 단순한 크리처나 살인마가 주는 말초적인 공포를 넘어, 인간이 가진 근원적인 필멸성과 실존적 불안을 장르적으로 영리하게 비틀어낸 마스터피스였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으스스한 고성과 목숨을 건 대역들의 지붕 위 묘기

작품이 풍기는 특유의 시각적 기괴함과 음산한 공포는 철저하게 계산된 로케이션의 힘이었습니다. 미술사학자 출신이기도 했던 조르제 카디예비치 감독은 역사의 숨결과 기묘한 에너지가 동시에 흐르는 장소를 찾아내는 데 탁월한 안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제작진이 낙점한 촬영지는 오늘날에는 국경이 달라져 크로아티아 영토가 된 이로크(Ilok) 지역의 한 오래된 성이었습니다. 1791년 이탈리아의 한 귀족이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유서 깊은 성이었지만, 관리되지 않은 내부는 대낮에 보아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스산하고 으스스한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대다수의 영화 기사들이 이 작품을 잔혹한 호러로 분류했던 것과 달리, 정작 현장에 있던 배우와 스태프들의 기억 속에 남은 촬영 분위기는 대단히 유쾌했다는 사실입니다. 현장에서는 아찔하고 위험천만한 해프닝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습니다.

  • 줄을 풀어버린 대역들의 배짱: 정신병원의 가파른 경사지 지붕 위에서 벌어지는 사투와 추락 신을 촬영할 때, 안전을 위해 대역 배우들을 로프로 묶어두었습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베테랑 스턴트맨들은 줄이 거추장스럽다며 촬영 도중 멋대로 로프를 풀어버린 채, 아찔한 절벽 아래를 장난치듯 굽어보아 감독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 조르제 감독의 절규: 누군가 정말 떨어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인 조르제 카디예비치 감독은 메가폰을 잡고 현장이 떠나가라 "그만해! 당장 그만해!"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배짱 두둑한 대역들은 기어이 지붕 위에서 자신들만의 위험한 액션 연기를 끝까지 선보였습니다.
  • 상자 7줄 위의 고공 점프: 특히 미하일로의 대역을 맡았던 유명 스턴트맨 '즈본체'는 바닥에 커다란 판지 상자를 고작 일곱 줄 쌓아놓은 채, 까마득한 고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맨몸으로 투신하는 경이로운 장면을 단 한 번의 사고 없이 성공시켜 현장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걸작, 50년의 세월을 버텨내고 박제되다

영화 속 지상 과제는 싱그러운 여름 분위기를 내는 것이었지만, 실제 촬영이 감행된 시기는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 한겨울이었습니다. 주인공 밀란 미하일로비치는 자살을 감행한 이후 맨땅에 시체로 누워있는 장면을 찍기 위해, 살을 에어내는 겨울바람 속에서 오직 얇은 흰 셔츠 한 장만을 걸친 채 꽁꽁 얼어붙은 지면 위에 장시간 누워 이빨을 부딪쳐가며 버텨야 했습니다. 육체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강행군이었지만, 완성된 결과물을 마주한 감독과 배우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문학계나 영화계에서는 이와 같은 심리적 뉘앙스의 오컬트 호러 장르가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대중과 평단에 낯선 충격을 안겼던 이 작품은 세월이 흘러 TV를 통해 수차례 재방영되면서 비로소 그 진가를 완벽하게 인정받게 됩니다.

"극장 개봉 당시에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에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관객들의 안목이 높아진 후에야 비로소 이 묵직한 서스펜스의 가치를 이해하기 시작했죠. 매년 수많은 영화가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들어지고 고작 몇 년 만에 연기처럼 사라지지만, 조르제 카디예비치가 남긴 이 기묘한 세계관의 영화들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남아 컬렉터들의 손에서 결코 잊히지 않는 아카이브로 남았습니다."


💿 물리 매체(블루레이) 소장 가치

스트리밍 플랫폼의 압축된 비트레이트로는 결코 온전하게 담아낼 수 없는 독보적인 공기 질감을 가진 작품입니다. 미술사학자 출신인 조르제 카디예비치 감독이 정교하게 스카우팅한 크로아티아 이로크 고성의 황량한 텍스처, 그리고 음산하게 내려앉는 깊은 어둠의 음영은 오직 물리 매체의 압도적인 스펙을 통해서만 온전히 복원됩니다. 1970년대 동유럽 필름 장르 영화 특유의 서늘하고 거친 그레인 속에서 피어오르는 실존적 공포는, 이 타이틀을 단순한 감상을 넘어 하나의 '영화적 고고학 자료'로서 실물 소장해야 할 당위성을 완벽하게 증명합니다.

 

[해당 내용은 아래의 물리매체 부가영상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Unboxing] 렙티리카 (Leptirica, 1973) - 포크 호러 박스셋 Disc 3 개봉기 :: 4K 개봉기 아카이브

 

[Unboxing] 렙티리카 (Leptirica, 1973) - 포크 호러 박스셋 Disc 3 개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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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klog.tistory.com

 

[해당 영화에 대한 감상문은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찰나의 극장(단편 전용) #3] 《렙티리카》를 압도하는 고딕 미장센, 그리고 의연한 파국의 심리극: 《슈티체니크 (Štićenik, 1973)》 No. 137 :: 4K 개봉기 아카이브

 

[찰나의 극장(단편 전용) #3] 《렙티리카》를 압도하는 고딕 미장센, 그리고 의연한 파국의 심리

물리 매체 박스셋의 서플먼트와 단편 폴더를 디깅하는 즐거움은 바로 이런 숨은 원석을 발견할 때 온다. 동일한 해인 1973년에 제작된 조르제 카디예비치(Đorđe Kadijević) 감독의 대표작 《렙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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