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영화 <렙티리카 (Лептирица, 1973)>의 물리매체에 수록된 부가영상을 보고 개인적으로 정리한 영화 제작과
관련된 비하인드 이야기입니다. 사실 렙티리카라는 영화에 대해서 아는 분들이 얼마나 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나름 신경써서 정리한 글입니다.

유고슬라비아 고딕 호러의 거장 조르제 카디예비치 감독의 1973년 수작, <처녀의 연주(Devičanska Svirka)>. 성(城)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처연하고도 기괴한 멜로 드라마는 지금 보아도 기묘한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이 아름답고도 서늘한 영화의 뒤편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주인공 '이반' 역을 맡았던 배우 고란 술타노비치(Goran Sultanović)의 회고를 통해, 70년대 촬영 현장의 생생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해드립니다.
신인 배우와 당대 최고의 대스타의 만남

당시 연극영화아카데미를 갓 졸업한 풋내기 신인이었던 고란 술타노비치는 조르제 카디예비치 감독의 눈에 띄어 덜컥 주연급인 '이반' 역에 캐스팅됩니다.
그의 상대역은 당시 유고슬라비아 전역을 뒤흔들던 대스타 올리베라 카타리나(Olivera Katarina)였는데요. 제작진 전체가 그녀 앞에서 숨을 죽일 정도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풍겼다고 합니다. 신인 배우 입장에서는 대선배이자 대스타와 연기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압박이자 두려움이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조금 두려웠습니다. 모든 스태프가 그녀를 경외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저를 동등한 파트너로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 고란 술타노비치
"오늘 촬영은 취소야" - 대스타의 기분 좋은 탈주 사건

인터뷰 중 가장 흥미로운 일화는 촬영 기간 중 일어난 '심야 탈주 사건'입니다. 촬영지였던 둔제르스키 성 근처 숙소에서 쉬고 있던 고란의 방 문을 누군가 두드렸습니다. 문을 열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올리베라 카타리나.
그녀는 다짜고짜 고란에게 옷을 입으라고 한 뒤, 자신과 인연이 있던 인근 데로네 마을의 집시 아지트(여관)로 그를 데려갔습니다. 낮고 허름한 선술집에는 시골 술정뱅이들이 가득해 고란은 겁에 질렸지만, 집시들에게 올리베라는 '성 니콜라우스'이자 여왕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녀는 밤새도록 그들과 어울려 노래를 불렀고, 고란은 넋을 잃고 그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새벽,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올리베라는 신인 배우에게 귀여운 범죄(?) 모의를 제안합니다.
"내일 촬영 의상 다 챙겨 입고 촬영장에 가긴 가되, 우린 촬영 안 할 거야. 내가 몸이 안 좋다고 말해둘 테니까."
실제로 다음 날, 밤을 새워 초주검이 된 고란이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말은 "올리베라 씨의 건강 문제로 오늘 촬영이 취소되었습니다"였습니다. 대스타의 화끈한 성격과 신인 배우를 향한 짓궂으면서도 인간적인 배려가 돋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방영 당일 '불발', 그리고 20년 후에야 확인한 결과물

당시 유고슬라비아 방송가에서는 국경일이나 전쟁(제2차 세계대전)을 기념하는 국책 영화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1940년대 배경이 아닌, 중세 고딕 스타일의 호러·미스터리 장르를 만든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모험이자 파격이었습니다.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으며 TV 프리미어 방영 당일이 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방영 직전 상영 취소 공고가 내려집니다. 당시 정치적·사회적 검열의 칼날을 피해 가지 못한 것이었죠.
디지털 촬영이 없던 셀룰로이드 필름 시절이었기에, 현장 모니터링조차 못 했던 고란 술타노비치는 결국 자신이 젊은 날 온 힘을 다해 찍은 이 아름다운 영화를 20년이 훨씬 지난 후에야 처음으로 시청할 수 있었습니다.
맺음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속하는 것'

"그때 제때 방영되었더라면 제 커리어가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젊을 때는 모든 기회가 열려 있죠. 인생에서 결국 중요한 것은 '버티고 지속하는 것'입니다."
비록 시대를 앞서간 탓에 오랜 시간 빛을 보지 못했지만, 고란 술타노비치는 <처녀의 연주>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에피소드로 기억합니다. 거장의 침착하고 부드러운 디렉팅, 그리고 대스타와의 강렬했던 우정이 녹아 있는 이 작품은, 50년이 지난 지금 블루레이 등의 물리 매체로 귀하게 부활하여 전 세계 장르 영화 팬들에게 시대를 초월한 서늘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해당 내용은 아래의 물리매체 부가영상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Unboxing] 렙티리카 (Leptirica, 1973) - 포크 호러 박스셋 Disc 3 개봉기 :: 4K 개봉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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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화에 대한 감상문은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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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은 조르제 카디예비치(Đorđe Kadijević) 감독의 탐미적인 고딕 호러 미학이 정점을 찍은 해였다. 전작 《렙프리카》의 토착적 거침과 《슈티체니크》의 정교한 밀실 심리극을 관통한 이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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