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들은 뚜렷한 메시지나 탄탄한 서사보다는, 감독이 창조해 낸 기괴한 이미지와 독특한 분위기 그 자체로 기억되곤 한다. 1980년에 개봉한 켄 러셀 감독의 《상태 개조(Altered States)》가 바로 그런 부류의 끄트머리에 있는 괴작이다. 인간의 의식과 진화라는 거창한 철학적 주제를 던지지만, 정작 영화가 끝난 뒤 뇌리에 남는 것은 감각 차단 탱크 속에서 벌어지는 끔찍하고 기분 나쁜 시각적 환각들뿐이다. 서사의 알맹이에 대한 의문은 남지만, 그 기이한 아우라만큼은 결코 쉽게 잊히지 않는다.

80년대 아날로그가 빚어낸 기괴한 시각적 유희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은 단연 '시각적 기괴함'이다. CG가 발달하지 않았던 1980년대, 감독은 오직 아날로그 특수효과와 미친 상상력만으로 약물에 취해 변형되는 인간의 정신세계를 스크린에 토해낸다. 종교적 상징물이 뒤틀리고 원시적인 환각이 번쩍이는 사이키델릭한 연출은 굉장히 혼란스럽고 기괴하다. 영화적 내공이 부족한 시절에 이 작품을 접한다면, 서사를 따라가기보다는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시각적 폭격에 그저 압도당하거나 튕겨져 나가기 십상이다.

의식의 심연에서 퇴화하는 육체 (※ 줄거리 및 결말 스포일러)
하버드대 교수인 에디 제섭(윌리엄 허트)은 인간 의식의 기원을 찾겠다는 핑계로 멕시코 원주민의 환각제와 '감각 차단 탱크'를 결합한 극단적인 실험에 집착한다. 하지만 정신적인 탐구로 시작된 이 실험은, 어느 순간 그의 육체 자체를 과거로 '역진화'시키는 끔찍한 바디 호러로 변질된다. 에디는 털이 수북한 원시 유인원으로 변해 동물원을 난장판으로 만들기도 하고, 종국에는 우주의 원초적 물질(무, 無)로 붕괴할 위기에 처한다.
폭주하는 실험실 속에서 형체를 잃어가는 에디를 구원하는 것은 뜻밖에도 아내 에밀리(블레어 브라운)의 헌신적인 사랑이다. 기괴한 SF 호러로 끝을 모르게 질주하던 영화가 갑자기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고전적이고 다소 낭만적인 결말로 휙 꺾여버리는 이 마무리는,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묘한 불협화음을 내며 당혹스러움을 안기기도 한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 혹은 독특한 작가주의의 발현
거창한 과학적·철학적 질문들을 잔뜩 던져놓고는, 결국 그 해답을 찾기보다는 시각적인 폭주와 기괴한 이미지 소비에만 집중하다 끝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철학적 깊이를 잃어버린 '알맹이 없는 특이한 영화'로 비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서사의 치밀함이 부족할지언정, 이런 기괴한 상상력을 할리우드 자본으로 영상화해 낸 켄 러셀이라는 인물의 범상치 않음만큼은 확실하게 각인된다.
"내가 이런 영화를 못 알아봐서 그런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 알맹이는 없어 보이는데 뭔가 상당히 특이한 영화다. '켄 러셀'이라는 독특한 감독을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하자, 정도다."
때로는 완벽하게 이해하고 감동받아야만 영화를 소비하는 것은 아니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쾌하고 기이한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켄 러셀'이라는 독특한 이름 석 자를 수확한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호러 팬의 여정에서 충분히 흥미로운 이정표가 된다.
💿 물리 매체 수집가의 덧붙이는 기록 기괴한 아날로그 특수효과와 환각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원색적인 조명 연출은 비트레이트가 낮은 스트리밍 환경에서는 화면이 깨지거나 뭉개지기 일쑤다. 이 미친 시각적 폭주의 디테일을 그나마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질 좋은 물리 매체가 필수적이다. 비록 스토리는 갸우뚱할지라도, 80년대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끝을 보여주는 사이키델릭한 영상미만큼은 소장용 블루레이 라이브러리에 기괴한 컬렉션 하나를 추가하는 셈 치고 꽂아둘 만한 독특한 가치가 있다.
[Unboxing] 상태 개조 (Altered States, 1980) - 영국 HMV 독점판 블루레이 (HMV Exclusive Blu-ray) :: 4K 개봉기 아카이브
[Unboxing] 상태 개조 (Altered States, 1980) - 영국 HMV 독점판 블루레이 (HMV Exclusive Blu-ray)
Overview: 감각 차단 탱크에서 시작된 기괴한 진화SF와 바디 호러를 사랑하는 영화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시각적 충격을 선사했던 켄 러셀(Ken Russell) 감독의 1980년작, 블루레이 개봉기입니다. 이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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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호러의 심연 #3] 저주받은 계곡, 식민주의의 원죄가 빚어낸 악마 - <아이즈 오브 파이어>(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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