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영화 <Scream of the Demon Lover (Il castello dalle porte di fuoco, 1970)>의 물리매체에 수록된 부가영상을 보고 개인적으로 정리한 영화 제작과 관련된 비하인드 이야기입니다. 재미로 올리는 글이니 가볍게 봤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스페인 고딕 호러 《악마의 연인의 비명 (Scream of the Demon Lover, 1970)》 리뷰에 이어, 오늘은 이 기묘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감싸고 있는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풀어볼까 합니다.
블루레이 서플먼트에 수록된 유로 호러 전문가 '스티븐 쓰로우어'의 비디오 에세이를 감상하다 보니, 영화 본편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제작 비화와 당시 스페인 영화계의 씁쓸한 현실들이 숨어 있더군요. 장르 영화 팬이라면 무릎을 탁 칠 만한 비하인드 스토리 5가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액션 장인의 훌륭한(하지만 짧았던) 호러 외도
메가폰을 잡은 호세 루이스 메리노 감독은 사실 호러 전문 감독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력 장르는 스파게티 웨스턴, 조로, 타잔, 전쟁물 같은 이른바 '소년들을 위한 모험물(Boy's Own adventure)'이었죠. 놀랍게도 그가 연출한 호러 영화는 이 작품을 포함해 단 두 편뿐입니다.
그는 고딕 호러 특유의 음습한 분위기와 시각적 쾌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영미권 시장에 팔아 꽤 짭짤한 수익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재능을 살려 호러 장르를 더 파고들지 않았는지, 평론가들조차 아쉬워할 정도입니다.


핏빛 호러의 탈을 쓴 『제인 에어』
이 영화는 겉보기엔 잔혹한 살인마가 등장하는 고전적인 유로 호러지만, 뼈대는 샬럿 브론테의 문학 『제인 에어』를 쏙 빼닮았습니다.
오만하고 무례하지만 내면에 낭만적인 열정을 품은 영주(야노스), 성의 은밀한 곳에 갇혀 있는 미친 혈육(형 이고르), 그리고 모든 악을 집어삼키는 클라이맥스의 화재 씬까지. 당차고 진취적인 여주인공이 '나쁜 남자'의 거친 단점을 깎아내고 진심에 도달한다는 전형적인 '바이런적 낭만주의(Byronic romance)' 판타지를 고딕 호러의 문법으로 영리하게 변주해 냈습니다.

하루아침에 증발해버린 남자 주인공
거만하지만 매력적인 남작을 연기한 주연 배우 '카를로스 키니'의 사연은 꽤 안타깝습니다. 그는 데뷔 후 불과 5년 동안 메리노 감독과 11편의 영화를 연달아 찍으며 특히 스페인에서 '조로' 전문 배우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호주에 영화사를 차리려던 지인의 꼬임에 넘어가 "호주의 영화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는 말만 믿고 이주했다가, 투자가 엎어지면서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맙니다. 호주에서 배역을 구하지 못해 떠돌던 그는 결국 고향인 카나리아 제도로 돌아가 피아노 바를 운영하며 쓸쓸히 영화계에서 잊혀졌습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좀 확인이 필요한 거 같습니다. 다른 평론가의 경우 연극 무대에 진심이어서 연극으로 방향을 틀었고 말년에는 부동산 사업(가업)으로 성공했다고 합니다.)

프랑코 독재 정권과 B급 영화인들의 생존법
메리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는 프랑코 독재 정권을 찬양하는 프로파간다성 영화(<시간의 다리, 1964>)가 포함되어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감독의 우파적 정치 성향으로만 치부하긴 어렵습니다. 안토니오 마얀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40년이라는 기약 없는 군부 독재 치하에서 영화인들이 투자를 받고 커리어를 유지하기 위해 정권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찍는 일은 씁쓸하지만 흔한 '생존술'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프로파간다 영화에는 제스 프랑코, 루치오 풀치 등 당대 유럽 호러 거장들과 작업했던 훌륭한 촬영 감독들이 대거 참여하기도 했으니까요. 시대를 견뎌내야 했던 B급 장르 영화인들의 서글픈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핏빛 살인귀와 고성의 비밀 뒤에 이런 다채로운 인간사들이 숨어 있었다니, 영화가 한층 더 입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으시나요? 다음에도 기분 나쁘고 기묘하지만, 결코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적인 작품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해당 내용은 아래의 블루레이 부가영상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Unboxing] 스크림 오브 더 데몬 러버 (Scream of the Demon Lover, 1970) - 단자 마카브라 Vol. 1 (Severin Films)
Overview: 붉은 손아귀에 사로잡힌 고성의 비밀70년대 유로 호러(Euro-Horror)와 고딕 스릴러를 사랑하는 컬렉터들에게 단비 같은 소식입니다. B급 장르 영화의 명가 세버린 필름(Severin Films)에서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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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화에 대한 감상문은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기분나쁘게 아름다운 것들 #3] 이성과 광기가 타오르는 성, <악마의 연인의 비명 (Scream of the Demon Lover, 1970)> :: 4K 개봉기 아카이브
[기분나쁘게 아름다운 것들 #3] 이성과 광기가 타오르는 성, <악마의 연인의 비명 (Scream of the Demon
안녕하세요, '기분 나쁘게 아름다운 것들' 카테고리에 또 하나의 작품을 꺼내봅니다. 지난번 다루었던 1965년작 리뷰, 혹시 기억하시나요? 기승전결이 나름 뚜렷해서 고딕 호러의 재미를 느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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