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1979)을 보고 나면 머릿속엔 질문 하나만 남는다. "그래서 복수는 누가 했는데?" 살인마 에노키즈가 사회에 복수를 한 건가? 아니면 피해자들이 그에게 복수를? 그것도 아니면 제목 자체가 관객을 향한 이마무라 감독의 조롱인 건가? 제목이 왜 복수는 나의 것인지 의문이 드는 "이 지랄" 같은 기분이야말로 이 영화가 노리는 가장 정직한 반응이다. 사실 이 영화의 제목은 성경 구절(로마서 12:19,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에서 따온 것이며, 여기서 복수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신조차 방관하는 지옥도를 보여준다.

'성자'인 척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트리거

에노키즈가 왜 이토록 구제 불능의 쓰레기가 되었는지 영화는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릿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아들이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닐 때도 '인내'와 '용서'라는 종교적 가면 뒤에 숨는다.

 

심지어 에노키즈의 아내와 묘한 기류를 형성하면서도 끝까지 도덕적인 척을 유지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에노키즈에게는 그 어떤 폭력보다 더 큰 구역질을 유발한다. 에노키즈의 무차별적인 악행은 어쩌면 자신을 끝까지 '용서'하겠다는 아버지의 그 오만한 도덕성을 파괴하기 위한 발악에 가깝다. "내가 이래도 용서할 거야? 이래도 성인인 척할 거야?"라고 묻는 듯한 살인의 행진, 이것이 바로 그가 선택한 비틀린 방식의 '복수'일지도 모른다.

복수는 나의 것? 아니, 복수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제목이 거창하게 '복수는 나의 것'이라고 떠벌리지만, 영화가 끝날 때 우리가 마주하는 건 복수의 쾌감이 아니라 완전한 허무다. 에노키즈는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법은 그를 처단하지만 그것이 피해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도 않는다.

 

나쁜 새끼가 저지르는 범죄에 '복수'라는 거창한 단어를 붙여준 이유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악의 순환을 비웃기 위함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증오하면서도 종교 때문에 복수하지 못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증오해서 세상을 난도질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신의 영역이라던 '복수'는 결국 공중에 흩뿌려진 뼈다귀처럼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멈춰버린다.

반응형

관찰당하는 짐승, 그리고 불편한 진실

이마무라 쇼헤이는 에노키즈를 동정하지도, 변호하지도 않는다. 그냥 현미경으로 벌레를 관찰하듯 그의 악행을 전시한다. 이 지독하게 객관적인 시선 때문에 관객은 더 불쾌해진다. "이 새끼는 왜 이래?"라는 질문에 영화가 "그냥 원래 이래"라고 답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의 제목은 인간의 도덕적 오만함에 대한 조롱이다. 복수가 신의 것이든 인간의 것이든, 현실에서는 그저 비릿한 피 냄새와 보상받지 못하는 고통만이 남는다는 것. 에노키즈라는 괴물은 그 허무한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소환된 짐승일 뿐이다.


이 영화의 차갑고 건조한 일본의 풍경과 에노키즈의 번뜩이는 눈빛을 저화질로 보는 건 범죄 현장을 보존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직무유기입니다. 물리 매체로 이 짐승의 숨결까지 생생하게 감시해야죠.

 

[관련 콘텐츠]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을 해부하다: <복수는 나의 것> 블루레이 개봉기 👉 [이마무라 쇼헤이의 차가운 시선을 고화질로 목격하기]

[블루레이 개봉기] 복수는 나의 것 (1979) - 악마가 된 인간, 디온(The On) 넘버링 한정판 :: 4K 개봉기 아카이브

 

[블루레이 개봉기] 복수는 나의 것 (1979) - 악마가 된 인간, 디온(The On) 넘버링 한정판

👺 타이틀 개요: 이마무라 쇼헤이가 파헤친 인간의 심연일본 영화계의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Shohei Imamura) 감독의 1979년 작, '복수는 나의 것 (Vengeance Is Mine)' 블루레이 개봉기입니다. 국내 부티크

4klog.tistory.com


"복수라는 성스러운 단어를 빌려와 한 인간 쓰레기의 짐승 같은 행적을 전시하며, 도덕과 종교라는 가면이 얼마나 무력하게 악의 질주 앞에 무너지는지 비웃는 냉소적인 걸작."

 

★ 이전 감상기 보기: [배우 낭비] 브레이브 원 (The Brave One, 2007): 조디 포스터라는 '명품'을 'B급 복수극'에 버리다. :: 4K 개봉기 아카이브

 

[배우 낭비] 브레이브 원 (The Brave One, 2007): 조디 포스터라는 '명품'을 'B급 복수극'에 버리다.

갑자기 여전사? 개연성은 '어디 갔나'영화는 약혼자를 잃고 처참하게 파괴된 한 여자의 일상을 조디 포스터의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훑으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문제는 그녀가 불법 총기

4klog.tistory.com

★ 다음 감상기 보기: 미야모토 무사시: 현대 일본 영화가 잃어버린 '진짜' 칼맛 (宮本武蔵, 1954) :: 4K 개봉기 아카이브

 

미야모토 무사시: 현대 일본 영화가 잃어버린 '진짜' 칼맛 (宮本武蔵, 1954)

솔직히 말해보자. 요즘 일본 현대물 영화들, 대체 왜 그 모양인가?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안 드는 게 정상이다. 나 역시 크라이테리언 콜렉션(Criterion Collection)이라는 '수집광의 굴레'

4klog.tistory.com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공감과 댓글로 응원 부탁드립니다!
4K 개봉기 아카이브는 수집가 디스크러버의 영화 감상과 물리매체 리뷰를 기록하는 블로그입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