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관객이 과거에 어떤 작품을 먼저 보았느냐에 따라 감상의 기준점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메리 해론 감독의 2000년작 《아메리칸 사이코》가 딱 그렇다. 1980년대 월스트리트의 물질만능주의를 조롱하며 크리스찬 베일의 미친 원맨쇼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훌륭한 스릴러이자 블랙 코미디다. 하지만 한국 관객이라면, 핏방울 튀기는 패트릭 베이트만의 광란 속에서 자연스럽게 2002년작 《공공의 적》에 등장했던 사이코패스 '조규환(이성재)'의 서늘한 그림자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원조 사이코패스 베이트만, 그리고 《공공의 적》 조규환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은 설경구, 이성재 주연의 《공공의 적》이다. 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성공한 엘리트(투자 금융사 부사장 vs 펀드매니저)지만, 그 이면에는 타인에 대한 극단적인 우월감과 반사회적, 사이코패스적인 폭력성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점에서 두 캐릭터는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비록 《아메리칸 사이코》가 2년 더 먼저 개봉한 '원조'격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공공의 적》을 먼저 접한 탓에 영화 내내 이성재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만약 관람 순서가 반대였다면 "공공의 적 이성재는 완전히 베이트만이구만!"이라며 무릎을 쳤을 것이 분명하다.

팝송과 도끼, 기괴하고 압도적인 시각적 카타르시스
《공공의 적》과의 흥미로운 비교를 논외로 하더라도, 이 영화가 선사하는 시각적 쾌감은 [멀티플렉스의 유령들] 카테고리에 오르기에 충분하다. 티끌 하나 없는 최고급 발렌티노 수트, 고급 명함의 텍스처에 집착하는 강박적인 미장센은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Huey Lewis and the News)의 경쾌한 팝송과 함께 번뜩이는 도끼날의 핏빛 액션으로 무자비하게 전환된다. 그 극단적인 대비가 만들어내는 그로테스크한 슬래셔 씬들은 크리스찬 베일의 신들린 표정 연기와 맞물려 압도적인 몰입감을 뿜어낸다.

핵심 줄거리와 모호한 결말 (※ 스포일러)
1980년대 후반 뉴욕 월스트리트. 잘나가는 20대 투자 금융사 부사장 패트릭 베이트만은 완벽한 외모와 철저한 자기 관리로 무장한 여피족이다. 하지만 동료 폴 알런의 명함이 자신의 것보다 고급스럽다는 사실에 열등감을 느낀 그는 결국 폴을 도끼로 살해하고, 통제할 수 없는 연쇄 살인마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폭주하던 베이트만은 경찰의 추격을 피해 변호사에게 자신의 모든 살인을 고백하는 음성 메시지를 남긴다. 하지만 다음 날, 시체들을 숨겨둔 폴 알런의 아파트는 피 한 방울 없이 완벽하게 청소되어 있고, 변호사는 베이트만의 고백을 그저 농담으로 치부하며 "폴 알런은 며칠 전 런던에서 나와 식사를 했다"고 말한다. 결국 이 모든 끔찍한 살육이 베이트만의 망상이었는지, 아니면 타인에게 철저히 무관심한 자본주의 사회가 진실을 묵인한 것인지 모호하게 처리된 채 영화는 찝찝하고 공허하게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면서 설경구, 이성재의 <공공의 적 (2002)>이 생각났다. 이성재라는 캐릭터를 어쩌면 이 영화의 패트릭 베이트만을 토대로 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직업적인 면이나 사이코적인 면이 너무나 흡사하다. 그래서 이 영화가 2년 먼저 나왔지만 반사회적, 사이코패스적 행동을 보는 내내 계속해서 이성재가 생각났다. 만약 이 영화를 먼저 봤다면 '공공의 적 이성재는 베이트만이구만!' 했을 텐데..."
관람의 순서가 만들어낸 유쾌한 인지 부조화. 하지만 80년대 뉴욕의 베이트만이든, 2000년대 서울의 조규환이든, 엘리트의 껍집을 뒤집어쓴 괴물들이 뿜어내는 섬뜩한 매력은 시공간을 초월해 관객을 압도한다.
💿 물리 매체 수집가의 덧붙이는 기록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최고급 명함 씬이나, 하얀 우비 위로 붉은 피가 튀어 오르는 시각적 콘트라스트는 고화질 물리 매체로 감상할 때 특유의 서늘한 색채가 더욱 돋보이는 타이틀이다. 감상을 마친 뒤, 물리 매체를 정리하듯 꼼꼼하게 구축해 둔 노션(Notion)의 '본 영화 관리' 데이터베이스를 열어 시청 로그를 남긴다. 전문적인 영화 리뷰와 물리 매체 수집 기록을 남기는 티스토리 블로그에도, '이성재의 롤모델(?)이 된 월스트리트의 도끼 살인마'라는 태그와 함께 이 핏빛 블랙 코미디를 자랑스럽게 포스팅해 둔다.
[블루레이 개봉기]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2000) - 현대인의 광기, 디지팩 한정판 :: 4K 개봉기 아카이브
[블루레이 개봉기]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2000) - 현대인의 광기, 디지팩 한정판
🩸 타이틀 개요: 완벽한 껍데기 속의 공허한 살인마크리스찬 베일(Christian Bale)의 광기 어린 연기 인생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스릴러 걸작, '아메리칸 사이코 (American Psycho)' 블루레이 개봉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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