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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TV에서 방영해 주던 <바보선언>(1983)을 보고 낄낄거렸던 기억이 있다면, 당신은 이장호 감독이 쳐놓은 가장 고단수인 함정에 빠졌던 거다. 이건 절대 어린이가 깔깔대며 볼 코미디가 아니다. 오히려 이건 80년대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입이 틀어막힌 예술가가 비명을 지르는 대신 선택한 '광기 어린 춤사위'에 가깝다. 이장호 감독은 영화를 망가뜨림으로써 영화를 구원하는 역설적인 마스터피스를 탄생시켰다.

 

"다 망쳐주마": 검열관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난장판

당시 전두환 정권의 시나리오 검열은 예술가들의 숨통을 조였다. 이장호 감독은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사사건건 가위질을 해대는 권력 앞에 좌절했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좋아, 니들이 원하는 대로 아무 내용도 없고, 논리도 없고, 대사조차 제대로 안 들리는 쓰레기(?)를 만들어주마."

 

그렇게 탄생한 <바보선언>은 대사 대신 기괴한 전자음과 비명, 그리고 만화 같은 효과음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엉망진창'의 미학은 그 어떤 정교한 서사보다 강력하게 당시 시대의 불온함과 뒤틀린 욕망을 폭로했다. 검열관들이 "이게 뭐야? 그냥 바보들이 노는 거네?"라며 방심하고 통과시킨 이 영화는, 사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조소를 날리는 가장 지독한 저항군이었던 셈이다.

코미디의 탈을 쓴 '잔혹한 비극'

어린아이의 눈에 똥칠(김명곤)과 육덕(이희성)의 몸짓은 그저 슬랩스틱 코미디였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다시 본 그들의 유랑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잔혹극이다. 절름발이 부랑자와 비슷한 처지의 육덕이 가짜 여대생(매춘부)과 맺는 그 기괴한 유사 가족 관계는, 화려한 고도성장의 빛 뒤편에 던져진 인간 이하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그 '이상한 분위기'는 세련된 연출의 부재가 아니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는 자들의 울분이 시각화된 결과다. 웃기지도 않은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효과음들은 관객에게 "지금 이게 웃겨? 정말로?"라고 묻는 듯하다. 성인이 되어 느낀 그 충격은, 감독이 40년 전 던진 비수가 이제야 심장에 꽂힌 것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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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터피스가 된 '자살 선언'

감독 스스로 이 영화를 "나의 장례식"이라고 불렀지만, 결과적으로 <바보선언>은 한국 영화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역으로 강제 견인했다. 논리적인 기승전결을 파괴하고,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소음조차 예술의 도구로 사용하는 이 파격은 지금 봐도 전율이 돋는다.

 

옥상에서 떨어지는 바보의 시신 위로 흐르는 경쾌한 음악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탈출할 방법은 오직 '죽음'뿐이라는 처절한 선언이다. 이장호 감독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바보들의 시선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권력의 허상을 무너뜨렸다. 이건 단순히 잘 만든 영화가 아니라, 억압된 시대가 낳은 기형적이고도 아름다운 괴작이자, 한국 영화 역사에 다시는 없을 독보적인 마스터피스다.


이 영화의 기괴한 전자음과 투박한 질감을 유튜브의 처참한 화질로 감상하는 건 이장호 감독의 예술적 저항을 모독하는 짓이 아닐까? 제대로 된 물리 매체로 그 시대의 '먼지'까지 확인해보자.

 

[관련 콘텐츠] 코미디의 탈을 쓴 잔혹한 마스터피스: <바보선언> 블루레이 개봉기 👉 [바보들의 처절한 유랑을 고화질로 목격하기] 

[블루레이 개봉기] 바보선언 (1983) - 시대를 앞서간 영상미, 한국영상자료원 시리즈 28 :: 4K 개봉기 아카이브

 

[블루레이 개봉기] 바보선언 (1983) - 시대를 앞서간 영상미, 한국영상자료원 시리즈 28

📼 타이틀 개요: 80년대 한국 영화의 충격적인 실험이장호 감독의 1983년작이자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실험 영화 중 하나로 꼽히는 '바보선언(Declaration of Fools)' 블루레이 개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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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날의 우리를 웃겼던 그 슬랩스틱은 사실 검열이라는 입마개를 당한 천재 감독이 피를 토하며 갈겨쓴 예술적 자살 선언이자, 80년대라는 지옥을 향해 날린 가장 우아한 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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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의 저주] 밀레니엄: 제2부 불을 가지고 노는 소녀 (The Girl Who Played with Fire, 2009): 3편을 위한 '

1편 내용이 가물가물하면 더 '쥐약'인 불친절한 전개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전작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의 강렬한 서사에 너무나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1편 내용이 가물가물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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