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테시가하라 히로시(勅使河原 宏)를 논할 때 우리는 대개 《모래의 여자(1964)》나 《타인의 얼굴(1966)》 같은 60년대 흑백 실존주의 명작들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그가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 전, 전후 복구와 급격한 현대화가 소용돌이치던 도쿄의 거리를 카메라에 담아내며 미학적 실험을 거듭했던 작품이 있다. 바로 1958년에 제작된 24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 《Tokyo 1958 (도쿄 1958)》다.

청년 예술가 집단 '시네마 57'과 파격적인 공동 연출
1950년대 후반 일본 영화계는 대형 제작사 중심의 틀에 박힌 상업 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테시가하라 히로시를 비롯해 하니 스스무(羽仁進), 마츠야마 젠조(松山善三) 등 기성 영화의 틀에 갇히길 거부한 9명의 젊은 영화인들은 '시네마 57(Cinema 57)'이라는 아방가르드 영화 집단을 결성했다.
이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Tokyo 1958》은 한 명의 감독이 전담 연출한 작품이 아닌, 젊은 아티스트들이 직접 거리로 나가 각자의 시선으로 담아온 감각들을 한데 모은 집단 연출(Co-direction) 방식의 실험적 결과물이었다.
스튜디오의 정돈된 조명과 시나리오를 벗어나, 카메라는 전후 복구와 서구화가 동시에 진행되던 도쿄라는 거대한 도시의 생생한 숨결 속으로 직접 뛰어들었다.

전통과 현대의 충돌, 그리고 타케미츠 토루의 전자음향
《Tokyo 1958》이 선사하는 시각적·청각적 충격은 '전통과 현대의 기괴한 불협화음'에서 온다.
- 시각적 몽타주: 가부키, 인형극, 사찰로 대표되는 일본의 고유한 전통 양식과 전철, 네온사인, 파친코, 미군 문화가 뒤섞인 도쿄의 밤거리가 교차한다. 카메라는 빠르게 전환되는 컷과 감각적인 프레임 구도로 도시의 혼란과 활기를 정면으로 포착한다.
- 타케미츠 토루의 사운드 스코어: 감독의 평생 음악적 동반자인 타케미츠 토루(Tōru Takemitsu)는 도시의 소음, 전위적인 전자음, 그리고 현악 스코어를 기묘하게 합성했다. 화면과 음악이 어우러지며 시청자에게 극적인 몰입감과 묘한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이 24분짜리 도시 교향곡(City Symphony)은 훗날 테시가하라 히로시가 장편 영화에서 보여줄 '공간과 인간, 그리고 사물의 질감을 시각화하는 천재적 감각'의 완성형 전초전이었다.

크라이테리온(Criterion)의 부가영상이 가진 진짜 가치
상업성이 없는 1950년대 해외 전위 단편 다큐멘터리를 오늘날 우리가 고화질로 감상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OTT 스트리밍 환경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러나 크라이테리온 컬렉션(Criterion Collection)은 테시가하라 히로시 3부작 박스세트(Three Films by Hiroshi Teshigahara)를 출판하면서, 필름 구석에 잠들어 있던 《호쿠사이(1953)》, 《이케바나(1957)》, 그리고 《Tokyo 1958》을 스페셜 피처(부가영상)로 완벽하게 디지털 복원하여 수록했다.
이것이 바로 물리매체 수집가들이 실물 디스크를 고집하는 명확한 이유다.

《Tokyo 1958》은 단순한 50년대 도쿄의 기록물이 아니다. 기성 영화판의 틀을 깨부수려던 청년 테시가하라 히로시의 뜨거운 에너지와, 거대 도시 도쿄의 소음과 빛을 담아낸 위대한 아방가르드 도시 에세이다.
서재 한 구석의 블루레이 디스크 속 부가영상 버튼을 누르는 순간, 1958년 도쿄의 거친 숨소리와 거장들의 청춘이 우리 눈앞에 다시 한번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해당 내용은 아래의 물리매체 부가영상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Unboxing] 모래의 여자 (Woman in the Dunes, 1964) -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블루레이 개봉기 :: 4K 개봉기 아카이브
[Unboxing] 모래의 여자 (Woman in the Dunes, 1964) - 크라이테리언 컬렉션 블루레이 개봉기
Overview: 모래 구덩이 속, 실존과 욕망을 탐구하는 아방가르드 걸작 (H2)아베 코보의 동명 소설을 스크린에 완벽하게 옮겨낸 테시가하라 히로시 감독의 초현실주의적 걸작, 크라이테리언 컬렉션(Cr
4klog.tistory.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