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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은 데뷔작에서부터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소모품'으로 부려 먹는지 그 비정한 공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 정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일산의 밤을 지배하는 보스, 배태곤이다. 그는 문신을 내보이며 소리를 지르는 삼류 양아치가 아니다. 정갈한 수트를 입고 부드러운 말투로 '식구'를 챙기지만, 사실 그 속은 90년대 한국 사회가 낳은 가장 차가운 자본주의적 괴물이다.

 

"식구"라는 이름의 가스라이팅

배태곤이 막동이를 끌어들이는 방식은 소름 끼치게 우아하다. 그는 막동이의 순수함과 충성심을 알아보고 '막동아'라고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며 마치 친형 같은 포스를 풍긴다. 가정이 무너져 비빌 언덕이 없던 막동이에게 이 "식구"라는 단어는 구원처럼 들렸겠지만, 사실 그건 막동이의 목숨을 담보로 한 잔인한 계약서였다.

 

그가 보여주는 기묘한 카리스마는 막동이가 보스를 위해 칼을 드는 것을 '의리'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배태곤에게 막동이는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한 일회용 칼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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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의 정점과 바닥: 피로 쓴 영수증

배태곤은 조직의 서열을 유지하기 위해 '공포'와 '보상'을 아주 영리하게 배합한다. 그는 막동이가 상대 조직의 보스(한때 배태곤의 선배였던 김양길. 여기서 그를 보니 왜 그렇게 반가운지 모르겠다. 이유는 지난번 봤던 <손님은 왕이다, 2006> 영화 때문)를 살해하고 돌아왔을 때, 따뜻한 위로 대신 차가운 피의 영수증을 내민다.

[연기력 하드캐리] 손님은 왕이다 (2006): 배우들 연기가 아까운, 기괴하고 찝찝한 이발소 소동극. :: 4K 개봉기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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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남(동방우)의 '무명배우' 설정이 주는 서글픈 기괴함이 영화의 가장 영리하고도 비극적인 지점은 바로 '김양길'을 연기한 명계남(동방우) 배우의 정체성에 있다. 극 중 김양길은 이발사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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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컨피덴셜>의 부패한 경찰 조직처럼, 배태곤의 조직 역시 '더러운 일은 아랫놈이 하고, 훈장은 윗놈이 받는' 구조다. 막동이가 피 묻은 손을 씻으며 보스의 인정을 기대할 때, 배태곤은 이미 이 '성가신 증거(막동이)'를 어떻게 폐기할지 계산을 끝냈을 거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느와르적 비극의 핵심이다.

 

매너가 만든 지옥

영화의 끝에서 배태곤이 보여주는 모습은 관객의 숨을 턱 막히게 한다. 막동이를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세월이 흘러 막동이네 식구들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천연덕스럽게 밥을 먹는 그 뻔뻔함! 그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뭐 사실 그가 그 식당이 막동이네 가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알고 갔겠는가. 그는 끝까지 모르지만 미애(심혜진)는 막동이 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인생은 그저 강한 놈이 살아남는 비정한 서열의 세계일 뿐이니까.

 

그의 매너 있는 말투와 신사적인 태도는 오히려 그가 저지른 악행을 더 소름 끼치게 만든다. 막동이라는 '초록물고기'는 배태곤이라는 거대한 욕망의 그물에 걸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말라 죽어버린 셈이다.


"다정한 '형님'의 목소리로 청춘의 순수를 헐값에 사들여, 자신의 왕국을 견고히 다지는 데 쓰고 버린 배태곤이라는 괴물의 잔혹한 비즈니스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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