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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 감독의 <꼬방동네 사람들>(1982)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이상적인 여성상'이나 '승리하는 인간'의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결말은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현실적이고 씁쓸하다. 리어카의 짐을 전남편이자 한심한 소매치기였던 주석의 택시에 싣는 그 장면은, 명숙이 두 남자의 굴레를 벗어던지길 바랐던 관객의 뒤통수를 아주 차갑게 후려친다.

 

'상남자' 태섭과 '질척이' 주석의 대비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태섭(김희라)일지도 모른다. 그는 비록 남을 죽인 죄인이고 아내에게 빌붙어 산 거머리였지만, 마지막 순간만큼은 '진정한 로맨티스트'의 길을 택한다. 자신의 공소시효보다 명숙의 미래를 위해 "그를 잘 부탁한다"며 미련 없이 떠나는 모습은, 자신의 과거가 들통날까 봐 공포에 떨면서도 정작 사랑하는 여자의 행복을 위해 자리를 비켜줄 줄 아는 사내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반면 주석(안성기)은 어떤가? 지금은 떳떳하게 살고 있다며 접근하지만, 그는 결국 명숙의 인생에 화상을 남기고 아들에게 '가짜 영웅'이라는 가면을 씌우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런 그가 다시 명숙의 인생에 슬며시 발을 들이미는 모습은,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질척이는 굴레'의 시작처럼 보여 구역질이 날 정도다.

 

강한 여인이자 엄마를 원했던 관객, 그리고 무력한 현실

우리는 명숙이 리어카를 직접 끌며 두 놈 다 필요 없다고 외치길 바랐다. 하지만 80년대 꼬방동네의 현실은 그토록 잔인했다. 명숙의 선택은 지극히 '합리적'이지만 그래서 더 '절망적'이다. 아들을 키우기 위해, 당장의 생존을 위해 그녀는 다시 주석이라는 독배를 마시기로 한 것이다.(영화에서는 주석이 자신을 찾아와 책임지겠다는 걸 뭐 좋아하긴 한다.)

 

리어카의 짐이 주석의 택시에 실리는 순간, 명숙이 평생 가려온 검은 장갑 밑의 화상 흉터가 다시 욱신거리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녀는 자유를 향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또 다른 감옥으로 이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라진 낭만, 남겨진 비극

결국 <꼬방동네 사람들>은 우리에게 낭만적인 해피엔딩 대신 '생존의 비굴함'을 선물하는 게 아닌가 한다. 태섭의 그 고독한 퇴장이 찬란하게 느껴질수록, 주석의 차에 올라타는 명숙의 뒷모습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

 

우리는 여전히 명숙이 그 검은 장갑을 벗어 던지고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모습을 꿈꾸지만, 영화는 끝내 "이게 바로 인생의 질척이는 무게"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며 막을 내린다. 이 결말이 주는 불쾌함이야말로, 우리가 이 영화를 쉽게 잊지 못하게 만드는 진짜 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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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독한 인간사의 비극, 태섭의 그 고독한 뒷모습과 주석의 뻔뻔한 눈빛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복원된 고화질 소스가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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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안성기 배우님의 명복을 빕니다.


"로맨티스트 태섭의 숭고한 퇴장을 비웃듯 다시 시작된 주석과의 질척이는 재회, 두 남자의 굴레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한 한 여인의 생존을 위한 비릿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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