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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게시물은 영화 <유혹의 선 (Flatliners, 1990)>의 물리매체에 수록된 부가영상을 보고 개인적으로 정리한 영화 제작과 관련된 비하인드 이야기입니다. 재미로 올리는 글이니 가볍게 봤으면 좋겠습니다.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는 게 아니라, 은유하는 것이다."

1990년작 <유혹의 선(Flatliners)>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촌스럽지 않고 세련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영화가 80년대의 유행을 따르지 않고, 르네상스 미술 그리스 신화라는 고전적 아름다움을 병원이라는 차가운 공간에 이식했기 때문이다.

 

이 대담한 시각적 실험 뒤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거장, 프로덕션 디자이너 유지니오 자네티(Eugenio Zanetti)와 세트 데코레이터 앤 쿨지안(Anne Kuljian)의 기발한 아이디어가 숨어 있었다.


🏛️ Chapter 1. 파졸리니의 제자, 헐리우드에 오다

유지니오 자네티는 헐리우드 토박이가 아니다. 그는 60년대 아르헨티나 연극 무대에서 시작해, 유럽으로 건너가 전설적인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메데아> 팀에서 일하며 마리아 칼라스와 호흡을 맞춘 '진짜' 예술가다.

 

그가 40세가 다 되어 미국에 왔을 때, 조엘 슈마커는 그의 이방인적 감각과 20년의 내공을 단번에 알아봤다. 자네티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의대 실습실' 공간에 역사(History)신화(Myth)의 숨결을 불어넣기로 결심했다.

영화 속 세트장 스틸컷
영화 속 세트장 스틸컷


🌊 Chapter 2. 단테의 데스 마스크와 '남근석 가로등'

영화 곳곳에는 삶과 죽음을 잇는 은유적 장치들이 숨어 있다.

물의 반사 (Water Reflections)

케빈 베이컨이 레펠을 타고 내려올 때 스쳐 지나가는 벽화는 '단테의 데스 마스크'다. 촬영 감독 얀 드봉(Jan de Bont)은 자네티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바닥에 물을 흥건히 적시고 그 반사광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인 '스틱스 강(River of Styx)'을 시각화한 것이다.

남근석 가로등 (The Penis Lights)

현장 스태프들이 대놓고 "남근석 등(The Penis Lights)"이라 불렀던 조명 소품도 있다. 이동식 손수레에 달린 이 독특한 모양의 램프는 영화 전반에 걸쳐 10개나 제작되어 배치되었다. 다소 민망한 별명이지만, 관객에게 무의식적인 시각적 통일성을 주는 중요한 장치였다.

전혀 비슷하지 않지만 남근석 가로등 (The Penis Lights)이라 불리던 조명
영화 속 단테의 데스 마스크


🗿 Chapter 3. 위스콘신의 '비치 보이', 영웅이 되다 (The Grand Illusion)

이 부가영상의 하이라이트이자, 영화 미술의 승리라 불릴만한 사건이다.

 

영화 오프닝과 엔딩, 공사 중인 건물들 사이로 보이는 거대하고 웅장한 영웅의 석상을 기억하는가? 인류의 진보와 역동성을 상징하는 듯한 그 압도적인 조형물. 자네티는 이 석상이 꼭 필요하다고 우겼지만, 제작진에겐 8미터짜리 조각상을 만들 돈이 없었다.

 

그때 세트 데코레이터 앤 쿨지안이 기막힌 해결책을 찾아냈다. 위스콘신주 스파타에 있는 워터파크 조형물 제작사 'F.A.S.T.'에서 재고품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 저 거대 석상은 약 8m짜리 광고 조형물이었다.

 

그 석상의 정체는 바로 '26피트(약 8m)짜리 비치 보이(Beach Boy)'였다.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는 맥주 캔을 든, 워터파크 입구에 서 있어야 할 그 가벼운 동상이 트럭에 실려 촬영장으로 왔다.

 

미술팀은 맥주 캔을 떼어내고, 선글라스를 가리기 위해 투명 비닐을 5겹이나 칭칭 감았다. 조명을 때리고 로우 앵글로 잡자, 촌스러운 비치 보이는 순식간에 '고뇌하는 영웅의 석상'으로 재탄생했다. 관객 그 누구도 그 속에 선글라스 낀 남자가 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 Epilogue: 플라스틱 아래 숨겨진 희망

"우린 알잖아요. 공사가 끝나면 더 나아질 거라는 걸요."

 

앤 쿨지안은 영화 속 '공사 중인' 비주얼이 영화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고 말한다. <유혹의 선>은 과거의 죄를 마주하고, 고장 난 인생을 수리하는 이야기다.

 

비닐을 뒤집어쓴 비치 보이가 웅장한 예술품이 될 수 있듯, 우리의 실수투성이 인생도 언젠가 덮개를 걷어내면 더 나은 무언가가 되어 있을 거라는 희망. 그것이 바로 조엘 슈마커와 유지니오 자네티가 남긴 '미술의 마법'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

 

[해당 내용은 아래의 블루레이 부가영상을 통해 작성되었습니다.]

[해외판 블루레이] 유혹의 선 – 죽음의 선을 넘나든 의학 실험, 그 끝은 어디인가 :: 4K 개봉기 아카이브

 

[해외판 블루레이] 유혹의 선 – 죽음의 선을 넘나든 의학 실험, 그 끝은 어디인가

· Arrow Video에서 출시된 해외판 블루레이, 단일 디스크 구성· 1990년작 키퍼 서덜랜드·줄리아 로버츠·케빈 베이컨 주연 SF 스릴러· DTS-HD MA 5.1/2.0 사운드, 다국어 자막 포함· 슬립커버 포함 킵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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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문은 다음 글을 참고하세요.]

[용두사미 박사들] 유혹의 선 (Flatliners, 1990): 사후세계 보러 갔다가 도덕 교과서만 읽고 온 의대생들. :: 4K 개봉기 아카이브

 

[용두사미 박사들] 유혹의 선 (Flatliners, 1990): 사후세계 보러 갔다가 도덕 교과서만 읽고 온 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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