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욕망>(Blow-Up, 1966)은 한마디로 '뒤통수 얼얼하게 만드는 인지 부조리극'이다. 살인 사건의 결정적 증거를 찾았다고 믿었던 잘나가는 사진작가 토마스가 마주하는 건, 시체도 증거도 사라진 텅 빈 공원뿐이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에게 가장 불경하고도 철학적인 엔딩을 던진다. 바로 공도 라켓도 없는 판토마임 테니스 경기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믿기로 한 항복 선언
영화의 마지막, 토마스는 광대들이 공 없는 테니스 경기를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처음엔 한심하다는 듯 비웃던 그는, 누군가 보이지 않는 공을 주워달라고 하자 기어코 그 '존재하지 않는 것'을 주워 던져준다. 그리고 소름 끼치게도, 스크린에는 보이지 않는 테니스공이 바닥을 때리는 '텅, 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이건 토마스가 미친 게 아니다. 이건 '진실'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합의된 가짜'에 순응하기로 한 인간의 항복 선언이다. 사진을 확대(Blow-up)하며 실재를 파헤치려 했던 그의 모든 오만함이, 보이지 않는 공을 쫓는 광대들의 유희 앞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이 얼마나 허약한 모래성인지 안토니오니는 이보다 더 세련되게 증명할 수 없었을 거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영화의 결말이 의미하는 바는)?
살인 사건은 정말 일어났을까? 시체는 어디로 갔을까? 영화는 끝내 답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게 왜 중요해?"라고 되묻는다. 토마스가 공 없는 테니스 경기에 동참하는 순간, 그는 보이지 않는 살인보다 눈앞의 가짜 놀이가 더 '실재'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 장면은 현대인들이 마주한 '이미지의 과잉'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우리는 팩트보다 공유된 허상을 더 믿고 싶어 하며, 다수가 '공 소리'가 들린다고 하면 기어코 들리는 척을 해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안토니오니는 60년대 런던의 힙한 감성을 빌려와, 우리 모두가 사실은 공 없는 테니스 경기를 하며 열광하는 광대들과 다를 바 없음을 꼬집는다.

사라진 토마스, 남겨진 질문
마지막 장면에서 토마스는 넓은 잔디밭 위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마치 그 역시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지독한 허무주의는 관객에게 기분 나쁜 여운을 남긴다. 내가 본 100분의 영화는 진짜였을까? 내가 믿는 이 현실은 과연 실존하는 것일까?
이 영화를 '호감작'으로 꼽은 이유는, 아마도 이 불편하지만 우아한 의문이 주는 매력을 알아봤기 때문일 거다. <욕망>은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 당신이 굳게 딛고 서 있는 바닥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영화다.

60년대 런던의 화려한 색감과 입자 하나하나가 진실의 단서가 되는 이 영화를 스트리밍의 뭉개진 화질로 보는 건 '확대(Blow-up)'의 미학을 모독이 아닐까? 물리 매체의 선명함으로 그 보이지 않는 진실의 틈새를 직접 파고드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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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살인의 흔적을 쫓던 사진작가가 끝내 보이지 않는 테니스공의 소리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가 믿는 현실이라는 견고한 착각을 세련되게 무너뜨리는 현대 영화의 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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