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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험과 사랑, 그리고 윤리의 경계
· 완성되지 못한 세계관 속의 인간적 질문
· 감정은 진짜였지만, 설정은 허물어졌다
· 스페인 SF가 남긴 가능성과 한계


오비터 9(Orbiter 9, 2017)은 스페인과 콜롬비아가 공동 제작한 휴먼 SF 드라마다. 감독 하템 크라이셰(Hatem Khraiche)는 단 한 편으로 ‘아이디어 중심의 SF’를 구현하려 했다. 주인공 헬레나(클라라 라고)는 태어나서 한 번도 우주선을 떠난 적이 없는 인물이다. 그녀는 자신이 우주 이민 임무의 실험 대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 단조로운 삶 속으로 정비공 알렉스(알렉스 곤살레스)가 들어오면서, 모든 균형이 무너진다.

 

초반 설정은 탁월하다. 고립된 공간, 제한된 정보, 관찰당하는 인간 — 이 세 요소는 근본적인 SF 긴장을 만든다. 헬레나는 실험체이면서 동시에 감정의 주체다. 그녀의 눈빛은 문(Moon, 2009)이나 엑스 마키나(Ex Machina)의 주인공들이 보여준 ‘인간성과 인공성의 경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오비터 9은 그 경계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 감독은 과학의 차가움보다 사랑의 따뜻함을 선택하고, 그 순간 SF 의도는 로맨스로 희석된다.

 

알렉스가 헬레나를 구하려는 장면부터 영화는 철학적 SF에서 멜로드라마로 급격히 방향을 튼다. 인간 복제와 실험 윤리, 기술의 신성화 같은 문제들은 이야기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헬레나가 시스템을 벗어나 세상과 마주할 때, 관객은 진실을 알아도 충격을 느끼지 못한다. 세계관의 구체적 설명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험의 규모, 운영 주체, 사회의 반응 — 이 모든 요소가 공기처럼 사라져 있다. 결국 영화는 아이디어의 껍질만 남긴 채, 감정의 폭발로 서둘러 종결된다.(임신한 복제인간 설정은 이 영화가 처음인 듯?)

 

세계관의 밀도 부족은 SF 장르의 몰입을 가장 약화시킨다. 오비터 9의 공간은 철저히 통제되어야 하지만 세트의 한계와 구도 설계가 그 폐쇄감을 유지하지 못한다. 시각적으로는 매끈하지만, 감각적으로는 평면적이다. 거대한 설정을 유지할 내러티브의 뼈대가 약하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실험실 멜로’ 수준에서 멈춰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비터 9은 완전히 실패한 영화는 아니다. 이 작품은 스페인 SF 영화가 감정과 사유를 결합하려 한 드문 시도였다. 헬레나와 알렉스의 관계는 거짓된 세계 속에서도 인간이 끝내 감정을 만들어내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이 감정의 리얼리티 덕분에, 비록 설정은 붕괴해도 여운은 남는다. 헬레나가 처음으로 진짜 하늘을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은 “진실보다 경험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모순된 위안을 느낀다.

 

감독 하템 크라이셰는 이 작품으로 ‘관념적 SF’의 스페인적 변주를 시도했다. 서양 SF가 기술적 사실성과 정치적 상징을 강조했다면, 오르비터 9은 감정과 관계, 인간의 내면을 중심에 두었다. 하지만 그 실험은 완성형에 이르지 못했다. 아이디어는 훌륭했으나, 구조는 허약했고 철학은 낭만으로 녹아버렸다. 그 아이러니가 이 영화의 매력이자 한계다.

 


“거짓된 세계에서도 사랑은 실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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