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2월 개봉한 정초신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자, 한국 영화 르네상스 태동기에 등장했던 독특한 범죄 코미디 《자카르타(Jakarta)》. 김상중, 임창정, 진희경, 윤다훈, 이재은, 김세준, 박준규 등 당대 충무로와 방송가를 주름잡던 스타들이 대거 뭉친 이 작품은 "털거나 털리거나, 완벽한 하루는 없다"는 모토 아래 한 은행을 동시에 노리는 세 무리의 은행털이를 그린다. 밀레니엄 전환기 특유의 B급 감성과 통쾌한 반전으로 관객을 들었다 놨던 팝콘 무비다.

2000년의 한국 영화계는 팽창하는 멀티플렉스 자본과 함께 할리우드 장르의 문법을 가장 공격적으로 이식하고 번안하던 실험의 용광로였다. 정초신 감독의 데뷔작 〈자카르타〉는 당시 쿠엔틴 타란티노와 가이 리치가 촉발했던 복수 시점의 범죄 활극과 케이퍼 무비의 외피를 세기말 충무로의 토양 위로 거칠게 끌어온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전반부는 관객에게 심각한 미학적 당혹감을 안긴다. 오광투자금융이라는 단 하나의 공간으로 몰려드는 세 무리의 강도단은 지나치게 도식적이며, 인물들의 연기는 조율되지 않은 연극처럼 삐걱거리고, 숏과 숏 사이의 개연성은 일부러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하듯 헐겁다. 이 불균질하고 기괴한 만듦새는 흡사 상업 영화의 규격을 이탈한 기괴한 '한국형 컬트 영화'의 탄생을 목도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영화의 진짜 묘미는 이 모든 허술함을 스스로의 장치로 폭로하는 후반부 반전의 순간에 발생한다. 스크린 위에서 벌어졌던 조악한 총격전과 우스꽝스러운 인질극은 연출의 무능이 아니라, 부사장 사현(윤다훈)이라는 단 한 명의 탐욕스러운 희생양을 완벽하게 농락하기 위해 사기단 전체가 설계한 '치밀한 연극'이었음이 밝혀진다. 즉, 영화 초반부의 조악한 연기와 작위적인 설정들은 영화 바깥의 관객과 영화 안의 사현을 동시에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축조된 '메타 연기(Acting within Acting)'의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자카르타'라는 은어가 표상하는 완전범죄의 귀결, 즉 모두가 한 패거리였다는 '짜고 치는 고스톱'의 서사는 서구 케이퍼 무비의 차가운 두뇌 싸움보다는 한국 특유의 능청스러운 마당극적 슬랩스틱에 뿌리를 내린다. 임창정의 억울한 코믹 제스처와 김상중의 과장된 무게감이 하나의 사기극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릴 때, 영화는 초반의 위태로웠던 B급의 늪에서 탈출해 산뜻한 장르적 쾌감의 안착지로 직행한다.
결국 〈자카르타〉는 완성도 높은 고전의 반열을 넘보기보다는, 2000년대 충무로가 가졌던 거침없는 패기와 반전 강박이 만들어낸 가장 유쾌하고 뻔뻔한 장르적 소품이다. 초반의 기괴한 불협화음을 통과한 자만이 맛볼 수 있는 그 경쾌한 뒤통수의 순간은, 밀레니엄의 극장가가 관객의 지갑을 털기 위해 고안해 냈던 가장 솔직하고 흥미로운 속임수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어설픈 삼류 강도극인 줄 알았던 촌극 뒤에 도사린 정교한 자작극.
초반의 기괴한 불협화음을 유쾌한 뒤통수로 수습해 내는 한국형 케이퍼 무비의 풋풋한 쾌감.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웨이브(Wavve)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감상했다. 2000년 개봉작답게 4:3 비율에 가까운 투박한 화질과 레트로한 색감이 세기말 충무로의 질감을 고스란히 전달해 주었다. 자칫 만듦새 무너진 B급 졸작으로 오해받을 뻔했던 전반부의 위기를 영리한 '짜고 치는 고스톱' 반전 하나로 산뜻하게 뒤집어엎으며 쏠쏠한 재미를 보장해 준 웰메이드 상업 오락물이었기에, 수장고의 [멀티플렉스의 유령들] 랙 한편에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올려둔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이전 감상문 보기: [크레딧이 올라가도 #53] 소박한 식탁과 총력전의 공모: 《이 세상의 한구석에 (この世界の片隅に, 2016)》가 은폐하고 드러내는 것들 No. 246 :: 4K 개봉기 아카이브
[크레딧이 올라가도 #53] 소박한 식탁과 총력전의 공모: 《이 세상의 한구석에 (この世界の片隅に
카타부치 스나오 감독이 연출하고 코노 후미요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2016년작 장편 애니메이션 《이 세상의 한구석에(In This Corner of the World)》. 제40회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애니메이션
4klog.tistory.com
★다음 감상문 보기: [먼지 쌓인 영사기 #30] 제복과 꼬투리의 공모: 아벨 페라라의 《보디 에일리언 (Body Snatchers, 1993)》이 벼려낸 압축된 실존적 공포 No. 249 :: 4K 개봉기 아카이브
[먼지 쌓인 영사기 #30] 제복과 꼬투리의 공모: 아벨 페라라의 《보디 에일리언 (Body Snatchers, 1993)
미국의 이단아 감독 아벨 페라라가 연출하고 개브리엘 앤워, 테리 키니, 메그 틸리가 주연을 맡은 1993년작 SF 스릴러 《보디 에일리언(Body Snatchers)》. 잭 피니의 전설적인 SF 고전 『신체 강탈자의
4klog.tistory.com
이 글이 유익하셨다면 공감과 댓글로 응원 부탁드립니다!
4K 개봉기 아카이브는 수집가 디스크러버의 영화 감상과 물리매체 리뷰를 기록하는 블로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