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바탕으로 거장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완성한 2018년작 《버닝(BURNING)》은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은 미스터리 드라마 걸작이다. 모호한 현실 속에 도사린 청춘의 분노와 계급적 무력감, 그리고 스크린이 꺼진 뒤에도 서늘하게 번지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였다.

줄거리: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 그리고 정체불명의 개츠비 벤
유통회사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소설가를 꿈꾸는 청년 종수(유아인)는 우연히 행사장에서 어린 시절 같은 동네 친구였던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아프리카 여행을 앞둔 해미의 부탁으로 고양이 '보일이'의 밥을 챙겨주며 그녀와 가까워진 종수는 해미에게 깊은 감정을 품게 된다.
얼마 후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는 현지 공항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부유한 청년 벤(스티븐 연)과 함께 나타난다. 낡은 트럭을 몰며 파주의 쇠락한 축사에서 지내는 종수와 반포의 고급 빌라에서 포르쉐를 모는 벤. 종수는 해미를 사이에 두고 벤의 여유롭고 공허한 삶의 태도에 묘한 박탈감과 질투를 느낀다.
어느 날 해미와 벤이 파주 종수의 집을 찾아오고, 대마초를 피운 뒤 해미가 노을을 배경으로 나체 춤을 추다 잠든 사이, 벤은 종수에게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는다. "난 두 달에 한 번씩 쓸모없는 남의 비닐하우스를 태워요. 아주 쉽게 태울 수 있고, 경찰도 신경 쓰지 않죠. 이미 다음 태울 비닐하우스를 골라뒀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 있어요."

결말: 사라진 해미와 핏빛 설원 위에 버려진 옷가지들 (※ 스포일러 주의)
그날 이후 해미는 연락이 두절된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종수는 파주 일대의 비닐하우스를 샅샅이 뒤지지만 불에 탄 비닐하우스는 어디에도 없다. 종수는 벤이 말한 '태워버린 비닐하우스'가 다름 아닌 해미를 살해한 은유임을 직감하고 벤의 뒤를 집요하게 미행한다.
벤의 고급 빌라 화장실 서랍에서 해미의 분홍색 손목시계를 발견하고, 해미가 키우던 고양이와 똑같은 고양이가 벤의 집 지하 주차장에 나타나 종수의 부름('보일아')에 반응하자 종수의 확신은 광기로 변한다.
마침내 한적한 시골 벌판에서 약속을 잡고 찾아온 벤을 마주한 종수는, 차에서 내린 벤의 복부를 칼로 무자비하게 찔러 살해한다. 숨이 끊어진 벤의 시신과 자신의 피 묻은 옷가지를 포르쉐 차 안에 밀어 넣고 불을 지른다. 눈 덮인 황량한 벌판 위에서 완전히 발가벗은 채 나체로 낡은 트럭을 몰고 도망치는 종수의 뒷모습과 함께 영화는 끝을 맺는다.

하루키와 이창동의 불협화음적 조화: 권태와 중2병이 빚어낸 서늘한 불편함
영화 《버닝》을 관람하고 뇌리에 짙게 남은 다섯 가지 감상은 다음과 같다.
-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텍스처: 원작인 단편 《헛간을 태우다》의 '헛간'은 한국의 '비닐하우스'로 치환되었으며, 이는 사실상 종수와 벤의 세계 사이에 끼어 사라져버린 '해미'라는 존재 자체를 상징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 이창동 감독 특유의 지독한 불편함: 이창동 감독의 작품을 두 편째 접하는 입장에서 함부로 단언하긴 조심스러우나, 관람 내내 폐부를 찌르는 궁극적인 감정은 역시 '불편함'이었다. 관객을 결코 편안한 방관자로 두지 않는 특유의 숨 막히는 연출이 압도적이다.
- 배우들의 압도적인 존재감: 유아인이라는 배우가 보여주는 억눌린 청춘의 불안과 광기는 새삼 놀라웠고, 이 작품을 통해 처음 접한 스티븐 연의 서늘하고 나른한 연기는 대체 불가능한 긴장감을 부여했다.
- 방황과 권태의 엑기스: 영화의 기저를 관통하는 핵심 정서는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는 이들의 방황, 망가진 인생에 대한 서글픈 한풀이, 그리고 부유한 자의 뼛속 깊은 권태였다.
- 두 거장의 기괴하고 의미 있는 만남: 결론적으로 암울함과 뼈아픈 리얼리즘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이창동 감독과, 특유의 감각적 허무와 여성에 대한 기괴한 환상을 다루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만남은 그 자체로 대단히 기묘하면서도 강렬한 파동을 남겼다.

타오르는 포르쉐와 설원 위에 벗어던진 옷가지. 타인의 권태에 희생된 비닐하우스와 서늘한 현실의 잔상.
● 영화 기록가의 덧붙이는 로그
넷플릭스(Netflix) 스트리밍을 통해 디지털로 감상했다. 해질녘 파주 들판의 푸르스름한 매직아워와 벤의 빌라에서 감도는 차가운 미장센이 OTT 화면 너머로도 묵직한 공기를 뿜어냈다. 비록 실물 패키지 개봉기는 아니지만, 관객의 안락함을 집요하게 부수며 서늘한 질문을 남긴 한국 영화의 수작으로서 수장고의 [크레딧이 올라가도] 랙 상단에 단단히 안착시킨다. 오늘 밤의 영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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